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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화: 규칙의 기원(下)-확신

by 짧아진 텔로미어

5화: 규칙의 기원(下)- 확신



중학생이 되던 해, 봄은 유난히 더디게 왔다.

직 녹지 않는 눈들이 길 곳곳에 있었고 입학식 날 아침 교문 앞의 바람은 매서웠다.

배정받은 학교는 집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다. 추운 날씨에 걷기에는 좀 먼 거리였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중학교라 운동장은 넓었지만 페인트가 벗겨진 자국이 있는 낡은 건물은 약간

흉물스럽게 보 학교에 대한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초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니던 성우와 다른 학교에 배정되어 더 아쉬웠다.

교실 안에서는 낯선 얼굴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고 자리 배치 후 나는 창가 쪽 맨 뒷자리 배정받았다.

날은 추워도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이 따뜻해 수업 시간에 졸음을 참기 쉽지 않았다.

입학 후 오래지 않아 나는 반친구들의 증상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자리의 누군가 갑자기 기침을 하거나 코를 훌쩍거리거나, 어제까지 멀쩡하던 친구가 결석했을 때

특히 병에 관련된 상황일 때 더욱 그랬다.


그 무렵부터 초등학생 때의 들이 떠오르고 우연이 아닐 수 있는 그 상황들을 확인해 보 싶은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결국 나만의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노트를 하나 만들었다.

겉표지는 아무 무늬도 없는 회색노트.

첫 장에는 날짜, 이름, 증상, 접촉 방식, 경과, 대상(전이 목표)을 적었다.

무맹랑하다는 결론으로도 끝날수 있는 실험이었지만 확신을 갖기 위해선 필요한 일이었다.

차츰 실험결과로 노트의 페이지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실험 1] 날짜: 3월 17일

감기:(기침·콧물. 고열) — 대상 A(반 친구, 연준)

접촉: 손을 잡고 양호실까지 동행 (약 4분)

내 상태: 무증상

전이 목표: 체육 시간마다 짝을 밀치던 B(상빈)

전이 방식: 체육관 출입문에서 어깨가 스

경과: 다음 날 연준이는 열이 떨어짐. 상빈이 고열로 결석.


[실험 2] 날짜: 4월 9일

식중독: (복통, 설사, 구토) — 대상 C(민하)

접촉: 등을 쓸어주며 보건실 동행 (약 6분)

전이 목표: 매점 줄 새치기·욕설로 유명한 D(동규)

전이 방식: 매점 계산대에서 손등 접촉함

경과: 당일 민하 회복. 같은 날 오후 동규 복통 호소, 보건실 직행.


이후로도 몇 번의 실험 일지로 노트가 채워졌다. 접촉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길이나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옮겨가지 않았다. 반드시 피부의 경계가 닿아야 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을 알았다.

내가 원해야 했다. 원하지 않으면 아무리 접촉해도 전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반대로, 내가 강하게 의도하면 아주 짧은 스침으로도 충분했다.

전이는 3일 내로 해야 했다. 첫 접촉 이후 삼일 동안은 내게 어떤 증상도 생기지 않았다.

그 기간 안에 전이를 하지 않으면, 네 번째 날 새벽 어김없이 내가 아팠다.

처음엔 우연이라 여겼지만 같은 상황이 두, 세 번 반복되었다.


[실험 00] 날짜: 9월 23일

장염 — 대상 E(경호)

접촉: 어깨 지지, 물 건네기, 보건실 침대로 옮김

전이 목표: 길에서 초등학생들 괴롭히던 동네 고등학생 두 명 중 한 명(익명)

전이 방식: 버스 정류장에서 스침 시도 → 실패(접촉 실패), PC방 입구에서 카운터 줄에서

가벼운 부딪힘 시도 → 실패, 귀가 길 골목에서 그 앞에서 떨어진 핸드폰 줍는 척하며 접촉 → 피함

결론: 미전이


그날 시험 공부를 하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시 잠이 들었었다.

새벽 3시쯤, 복통과 함께 깼다. 식은땀이 등에 흘렀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설사가 멈추지 않았다.

정확히 삼 일 후였다. 시험이 끝나자자 동네 병원에서 수액을 맞았다.

시험은 망했지만 새로운 규칙을 확신하게 된 걸로 위안을 삼았다.

이 규칙에는 데드라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시간을 넘기면 병은 내 것이 된다는 것을.

지금까지 여러 실험을 통해 최종적으로 확인된 규칙들이다.


규칙 1. 다른 사람의 병을 내 몸에 옮길 수 있다.

규칙 2. 그러기 위해선 접촉은 필수.

규칙 3. 3일 이내에 남에게 옮겨야 한다. 접촉과 옮기겠다는 의도는 필수적

규칙 4. 3일 이후에도 전이 실패하면 내가 그 병을 앓게 된다.


중학교 때 실험을 통해 규칙의 큰 줄기가 완성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실험은 더 정교해졌다. 생물 시간에 배운 지식들은 내 실험노트를 점차

과학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연구계획서 같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접촉의 종류(악수, 포옹, 어깨 스침, 잔 건네기, 필기구 전달)

접촉 시간(1초 미만/1~3초/3초 이상), 강도(압박/스침), 환경(실내/실외/물/땀)

의도 강도(없음/약함/강함)를 세분화해서 정교한 실험을 구상했다.


[편도염 케이스]

1학년 봄, 목이 너무 아파 목소리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던 아람이을 양호실에 데려다주었다.

다음 날 아람의 통증이 줄고, 그날 오후 수업 도중 목소리가 작다고 학생들 잡아채는 체육부장이

목이 파하며 양호실로 갔다. 접촉은 공을 건네받으며 손가락이 스친 1초. 의도 강도 중. 전이 성공.


[두통 케이스]

모의고사 전날, 수진이 머리를 부여잡고 울었다. 양호실 침대 위에서 나는 그의 관자놀이를 눌러주었다.

다음 날 수진은 시험지를 끝까지 풀었고, 종례마다 ‘시간이 금이다’라며 책상을 쾅쾅 치던 담임이 오

수업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두통. 접촉은 교무실 앞에서 성적표를 받을 때 서류봉투를 손에서 손으로

넘기며 2초. 의도 강도 약. 전이 성공.


[식중독 케이스]

급식에서 비린내가 났던 날, 도윤이 급식을 먹고 쓰러졌다. 나는 그를 부축하고 물을 건넸다.

전이 목표는 수업마다 친구 이름을 ‘번호’로만 부르는 선도부였다. 접촉은 체육관 입구에서 손을 스치는

나의 0.5초, 의도 강도 . 그는 복통과 설사로 쓰러졌다. 도윤은 다음 날 등교했다.


대부분 전이는 깔끔하게, 의도한 방향대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몇 번은 실패했고 며칠을 앓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매번 더 정교하게 법칙을 다듬었다. 실험은 내게 힘을 줬지만, 동시에 고민거리도

만들었다. 나는 왜 아픈 사람에게서 병을 져와 왜 다른 사람에게 그 병을 넘겨주는가.

초등학교의 민기, 태섭, 상훈은 대놓고 남을 괴롭히는 분명한 대상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의 체육부장, 담임, 선도부는 역할이었다.

사람은 역할 속에서 나쁘기도 하고, 그 역할을 내려놓으면 평범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들에게 병으로 벌을 줄 만큼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만의 다짐을 했다.

'지금의 병이 어차피 누군가의 몸에 있어야 한다면 착고 안타까운 상황의 사람보다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의 몸이어야 한다고. 나는 그 병의 방향만 정할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완전히 가벼워지지는 않았다.

판단은 언제나 틀릴 수 있다. 그러니 더 많이 알아야 한다. 더 정확해야 한다.

최소한 내 판단으로 엉뚱한 사람이 다치 일이 없도록


하나 여전히 불확실 것은 내 몸으로 병이 옮겨지는 순간이나 다른 사람에게 전이 순간에 나의 의도

대로 되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다. 내 몸에 병이 들어오고 나갈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초등학교 때 손 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함도 이제는 없다.

의도대로 내 몸으로 병이 옮겨졌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전이 이후의 결과를 다리는 것뿐이다.

여전히 지금도 불편한 일이기는 하지만 내게 주어진 규칙이라 어쩔 수 없다.


실험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를 우고 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그때의 눈물의 이유는 확실하지는 않다. 아마도 지금까지 만들어온 규칙의 확신에 대한 벅참과

한편으로는 괴물이 된 것 같은 자신에 대한 측은함 같은 양가감정 때문이었을 거다.


그해 겨울, 아버지가 물었다.

"넌 커서 뭐가 되고 싶니?."

나는 의사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고도 복잡했다.

많은 병을 만나려면 병이 오는 곳에 서 있어야 한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을 알아내려면

병력뿐 아니라, 눈빛, 생활사, 냄새, 떨림등을 읽어내는 정확함이 필요하다.

치료를 위한 정확함과 접촉이 자연스러운 장소가 필요하다. 치료를 위한 접촉이 가능한 곳.

이것들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장소는 응급실이라 생각했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실험을 늘리지 않았다.

의사가 된 이후를 위해 깊은 곳에 숨겨둔 실험노트처럼, 마음 깊숙이 모든 것을 숨겨두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의대에 진학했고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되었다. 이후의 시간은 당신이 아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복도의 바퀴 소리와 모니터의 경고음, 소독약과 피의 냄새, 고통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그 밤들 사이에서 나는 규칙을 다시 새겼다.

그리고 의사가 된 지금 내 의지대로 규칙 하나를 더 만들었다.

'내가 병을 전이시킨 환자가 오더라도 의사로서 최대한 정확하고 최선의 치료를 한다.'

그 시작은 사소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 규칙을 실행한다. 의사로서 그리고 심판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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