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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화: 규칙의 기원(上)-의심

by 짧아진 텔로미어

4화 : 규칙의 기원 (上)-의심



​따뜻한 커피잔 위로 모락 모락 오르던 온기는 순식간에 공기 중으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컵을 감싼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스함과 온전한 휴식이 주는 평화로움. 오랜만에 맛보는 이 기분 좋은

여유가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던 행복인가 싶다.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드르륵' 울린다. 액정에는 오래전 초등학교 동창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성우의 이름이 떠 있었다. ​바쁘게만 흘러가는 일상 속,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도 쉽지 않은 요즘이었다.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 연락에 마음이 동했다. 가볍게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고 저녁 약속을 잡았다.

성우는 나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음을 처음으로 의심하게 했던 친구다.

커피 한 모금을 꿀꺽 삼키며 잠시 눈을 감았다. 먼 과거의 한 장면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병을 전이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확신하는 순간부터 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다양한 환자를 접할 수 있는 응급실이 그 능력을 쓰기엔 최적의 장소라 생각여 응급의학과 의사

꿈꾸었고 현재 나는 그 꿈대로 응급의학과 의사로서 일하고 있다.

사실 그 결심을 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나는 전이의 규칙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단지 그때는 확신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규칙을 알게 된 몇 번의 우연한 기회 그리고 그 가능성을 몇 차례 실행해 보면서

내 능력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 처음의 시작은 초등학교 5학년 겨울이었다. 그날은 급식으로 먹음직스러운 햄버거 나왔다.

모두들 허겁지겁 맛있게 먹고 남은 점심시간에 추운 날씨임에도 평소처럼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했다.

오후 수업 시간 난히 급하게 먹었던 내 짝 성우가 배를 잡고 아파며 내게 말했다.

"나 토할 것 같아"

"선생님 성우가 배가 많이 아프고 토할 거 같대요"

성우는 얼굴이 하얘지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선생님은 양호실에 같이 데려갈 아이를 물었고

내가 손을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 짝이었고 가장 친한 친구여서 그리고 나 말고는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아서였다. 양호실로 가는 동안 잡은 성우의 손은 찬물에 담갔다가 뺀 것처럼 차가웠다.

성우 의 차가움, 시멘트 계단의 냄새, 양호실의 소독약 냄새가 아직 생생하다.


양호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보건 선생님이 성우를 눕히고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왔다.

성우의 이마를 잠깐 문질렀다. 그때 잠시 내 손을 통과하는 서늘한 느낌이 들던 것 같았다.

그 순간 한 친구가 내 머리를 치며 말했다.

"병원 놀이하냐?"

민기였다. 우리 반에서 매일 다른 아이를 골라 괴롭히던 애. 그는 내 뒤통수를 툭 치고 아무렇지 않게

도망쳤다. 그 순간 그 애 손목을 잡고 속으로 생각했다.

' 놈이 파야 하는건데'

성우는 따뜻한 물을 조금 마시고, 보건 선생님이 준 약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10분쯤 지나자 제 살 것 같다는 표정이다. 아직 토할 것 같은 느낌이 약간 있지만 괜찮아지는

중이라고 그는 말했다. 내가 먼저 교실로 돌아오고 한 시간 뒤 성우는 웃으며 교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례가 끝나갈 때쯤, 교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 어 이게 무슨 냄새야"

" 우엑 똥 냄새다"

복도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교실 문을 열고 뛰쳐나와 화장실로 달렸다. 민기였다.

엉거주춤한 걸음으로, 손은 배를 꽉 부여잡고, 얼굴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바지의 뒤가 젖어 있었고 곧 교실에 소문이 번개처럼 퍼졌다.

"민기 똥 쌋대요!"

아이들 웃음과 야유, 선생님의 황급한 제지, 다음날 민기는 장염으로 등교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햄버거 먹은 후 장염이 온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뒤로 몇 개월 후 소풍날이었다. 돗자리 위에서 과자를 먹던 지수가 갑자기 팔을 긁었다.

피부 위로 두드러기가 울룩불룩 올라왔고 너무 가려워해서 긁은 피부마다 빨갛게 피부가 부어올랐다.

지수는 울먹거였고, 선생님은 약상자를 찾았으나 두드러기에 쓸만한 약이 없었다.

가 우는 지수를 달래주려 손목을 잡았을 때 이전 성우때와 같은 약간 서늘한 느낌이 내 손을 타고

느껴졌다. 그때 반대편에서 태섭이라는 친구가 다른 친구의 과자봉지를 뺏고 도망가다가

나와 부딪쳐 넘어졌다.

"야, 비켰어야지!"

과자 부스러기와 함께 태섭이가 내 무릎 위로 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잡아 밀쳐내고 쟤한테나 옮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지수의 피부 발진들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30분쯤 지나자 증상이 사라졌다.

다음날, 태섭은 학교에 나오긴 했지만, 수업 중 갑자기 팔과 목덜미를 마구 긁기 시작했다. 하얀 피부 위에

붉은 반점. 어제 본 지수의 팔에 생긴 것과 너무 비슷했다. 선생님이 보건실로 데려갔다. 지수의 손을

잡았을 때 서늘한 느낌이 생각나고 내 생각대로 태섭이한테 옮겨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던 날, 영우가 눈을 비비며 왔다.

양쪽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노란 눈곱이 많이 끼어 있었다. 유행성 결막염이었다.

나는 휴지로 그의 눈가를 살살 눌러 눈곱을 떼어주었다.

미안해하는 그의 손을 잡고 바닥까지 빗물로 젖은 복도를 따라 양호실로 가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에 있던 상훈이 축구공을 내 쪽으로 강하게 차며 소리쳤다.

"받아라!" "슛 골인"

반사적으로 피했지만, 공이 내 종아리를 세게 스쳤고, 웃으며 뛰어가는 상훈이를 쫓아가

팔로 목을 감싸 쥐었다.

" 아파 놔 줘"

'눈병이나 옮아라' 속으로 생각했다.


그날 오후, 영우의 눈은 놀랄 만큼 깨끗해진 반면 상훈은 한쪽 눈이 충혈되 시작했다.

오후 수업 시간에는 양쪽이 다 빨개졌고 눈곱이 굳어 눈을 자주 깜빡였다.

아까 보건 선생님이 "전염성이라 격리해야 한다"라고 말 생각났다. 교실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운동장을 보며 생각했다.

이게 단순한 전염일까 아니면 내 의도대로 전이 된걸까.

왠지 매일 보던 학교 풍경이 약간 달라져 보인다는 기분이 들었다. 비슷한 세 번의 일을 겪

내 안에서 의심은 차츰 가능성으로 바뀌었고 본격적으로 확인을 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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