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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설은 중국의 사상가 순자(荀子)가 주장한 것으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이 앞서고 이기적이며 스스로를 절제할 능력이 부족해 악한 성향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인간의 이런 본성이 자연 그대로 놓여 있으면 갈등과 혼란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질서와 규범, 법과 교육을 통해서만
비로소 사회라는 공동체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결국 선함은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사회가 강요하고 길러낸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여러 차례 말했지만 이 성악설을 믿는다.
지금은 확신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의 악함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나는 오히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더 많다고 굳게 믿으며 자랐고
주변인들 또한 내게 착하다, 바르다, 선량하다는 말들을 자주 했었다.
그렇게 자라온 시간을 떠올려보면 내 어린 날들은 마치 순수함의 표본 같기도 했다.
그렇기에 내가 언제부터 성악설을 확고하게 믿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하다. 짐작하건대, 사소하지만 여러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나를 움직였고
그 여러 개의 작은 것들이 어느 순간 굳어져 나를 성악설로 끌어당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보자면 이런 사소한 것들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바다' 라는 시로 장려상을 받고, 부상으로 연필 몇 자루를 받은 적이 있다.
'바다는 부끄럼쟁이 언제나 소리 없이 바위를…' 이렇게 시작되던 시로 기억하는데 어린 나는
상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다.
그 기쁨을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던 친구는, 평소 착하고 의리가 있다고 믿었던 내 짝이었다.
그러나 그는 예상과 달리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나를 피했고, 며칠 뒤 나는 그가 다른
아이에게 "선생님은 OO만 예뻐해. 그래서 얄미워." 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말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마음은 나누는 것이라 믿었는데, 칭찬은 나눌 수 없는 것임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작은 일은 사람들의 선함이라는 것이 언제든 다른 색으로 쉽게 물들 수 있는 그런 색깔이란 것을
처음 깨닫게 해주었다.
비슷한 경험들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운동회 날, 꼭 함께 뛰자며 먼저 손을 내밀었던 친구는 시합 직전 아무런 예고 없이 다른 팀으로 가버렸다.
이유를 묻자 그는 웃으며 "걔가 너보다 더 빠르잖아. 너랑 하면 상 못 받았을걸?"이라 했다.
그리고 상으로 받은 노트를 자랑하듯 흔들어 보이며 자기 무리로 들어갔다.
그날, 나는 약속이라는 것도 결국 이익이 따를 때에만 유효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고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사람은 착한 게 아니라 착한 척을 한다.'
그 뒤로 나는 진실은 언제나 목소리 큰 쪽으로 기울고
거짓은 배워서 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불리할 때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선생님들은 늘 "착한 아이가 되자"라고 말했지만
그 말은 결국 착한 아이가 희생을 도맡으라는 말에 지나지 않았다.
착함이 칭찬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착한 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착한 사람이 쓰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이미 어린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런 오래된 기억들을 꺼내며 성악설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일주일 전 응급실로 걸려온
전화 때문이다. 그 날은 평소와 달리 웬일인지 조용하고 한산한 날이었다.
환자가 적어 모니터 소리마저 느슨하게 느껴지는 오후, 응급실 데스크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변조된 목소리 그리고 단 한마디하고 끊어지는 전화.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 후로 같은 전화가 며칠 동안 반복해 걸려왔다.
이런 전화를 받으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혹시 문제가 될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있었는지, 누군가 알아챌 만한 비밀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자신이 원한을 살만한 일들을 했었는지 등등.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맛볼 것이다.
그러나 정말 아무 일도 없다면, 장난 전화라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했는가.
나는 그 전화를 받는 순간,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누군가 내 비밀, 내 전이 능력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묘한 긴장감이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누가 믿겠는가. 병을 옮길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나는 그 외에는 떳떳했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 묘하게 신경쓰이는 전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문득 의과대학 시절을 떠올렸다.
의대 동기중 한명이 실제인지 우스갯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익명의 투서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다.
어느 누군가가 사회의 유력 인사들에게
'당신의 비리가 곧 폭로될 예정이니 발각되기 전에 피하라' 혹은
'당신의 죄가 드러났으니 당분간 몸을 숨기라'라는 편지를 보내고 며칠 뒤 확인해보니
편지를 받은 이들 대부분이 정말로 자리를 비우고 부재중이었다는 이야기.
우스운 농담처럼 들릴지 몰라도, 그 일화는 그들이 평소 얼마나 떳떳하지 못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위치가 높을수록 체면과 명예를 쌓아 올리는 데 더 많은 거짓과 위선이 뒤따른다는 말 같기도 했다.
의대 재학 시절 나는
인간적 매력과 학문적 깊이를 동시에 갖춘 A교수님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그는 보기 드물 정도로 인격적인 품위를 갖춘 인물로 학생들에게도 꼬박 존칭을 했다.
미화원 여사님들에게조차 고개 숙여 인사하는 품격있는 그의 뒷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의 말투와 태도, 걸음걸이까지도 따라하고 싶을 정도였다.
반면, 거칠고 고약한 성격의 교수 세 명을 속으로는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가 다시 익명 투서 얘기를 하며 앞서 말했던 세명의 교수에게
동일한 제목의 익명 메일을 보내고 그 결과를 같이 보자고 했다.
'발각되었습니다. 몸을 피하십시오.' 당신이 하고 있는 추악한 일들이 발각되었으니 이 경고를
무시하지 말라..' 이런 내용이었다.
그 날 저녁 나는 근거 있는 자신감과 맹신으로 내가 존경하는 교수님에게
똑같은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친구에게 내가 존경하는 A 교수님이 다른 세 명과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이유였다.
며칠 뒤, 결과는 너무나 명확하게 드러났다.
세 명의 교수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강의를 취소하고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예견된 일이었다.
그들이 떠난 빈자리에서 아직도 고약하고 천박한 악취가 나는듯했다.
반면, A 교수님은 그날도 본과 2학년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문틈으로 그를 확인한 순간, 그에 대한 내 존경심은 한없이 부풀었다. 사실 조금의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자랑스러웠고 조금이나마 불안해했던 것이 죄송스러웠다.
병원 실습을 마치고 돌아가던 그날 저녁
연구동 건물 앞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실고 있는 A 교수님을 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건네자, 그는 짐을 끌어올리던 손을 잠시 멈추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장기 휴가를 떠난다는 한마디. 그 말을 듣고 설명하기 힘든 불길함이 가슴에서 자꾸
일어남을 느꼈다.
다음 날, 나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A 교수님이 계획에 없던 장기 휴가를 전날 갑자기 신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소문은 물살처럼 번져나갔다.
그가 오랫동안 제자들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고 연구비를 횡령해 왔으며
암으로 투병 중인 아내가 있음에도 젊은 여자와 오래전부터 불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이야기였다.
존경은 산산조각 났고, 그 조각들은 날카롭게 내 안에 박혀 며칠 동안 쓰라렸다.
중학교 시절의 전이 실험 이후, 의사가 되기 전까지는 전이를 함부로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단 한 번 나는 그 약속을 어겼다
더 참담한 것은, 그 타깃이 내가 한때 무한 존경을 보내던 그 라는 사실이었다.
신경과 실습 중 내게 배정되었던 길랑바레증후군 환자. 길랑바레증후군은 면역체계가 말초신경을
공격해 근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급성 신경질환으로 다리 힘 빠짐, 마비 순으로 빠르게 진행할수 있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대부분 회복 가능한 질환이다.
그는 미상의 바이러스 감염 후 하체부터 서서히 근육이 마비되어 가던 환자였다.
그의 병을 내 몸에 옮긴 후 A 교수에게 전이시켰다.
배신감은 최악의 분노를 일으키는 감정이다.
그 이후, 교수의 상태에 대한 소문은 자주 들려왔으나 나는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가 내게 의미하던 모든 것은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내가 성악설을 더 굳게 믿게 된 여러 사건 중 가장 결정적인 사례, 그뿐이다.
그렇게 과거의 기억을 머릿속을 헤집던 순간 긴 정적을 깨뜨리는 전화벨이 울렸다.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한마디만 남기고 또다시 끊겼다.
누구일까? 정말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오래전 내가 보냈던 그 익명의 투서처럼, 나의 악함을 시험하고 나의 내면을
들춰내려는 장난일까?
응급실의 밝은 형광등 불빛이 내 마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