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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윤리적 경계

Dr.Transfer

by 짧아진 텔로미어


제14화 : 리적 경계



오늘 응급실의 위기는 겨울 특유의 건조함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잘게 분무된 물안개가 천장과 벽 사이를 조용히 떠다니다가 바닥으로 가라앉아 막을 형성한 것처럼

기분 나쁜 눅눅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단순히 외부 기온 탓이 아니라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무겁게 적셔진 결과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더욱 또렷했다.


1월 감기와 독감 등 호흡기 환자들이 울바람보다 더 매섭게 몰아는 시기이다.

그중에서 최서윤이라는 스물네 살의 여자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응급실 3번 침대에 앉아있는 그녀는 기침을 억누르려 애써보지만 한번 시작 기침을 멈추지 못하고

얼굴이 빨개질 때까지 속하고 있었다.


고열은 아니었으나 37.9도 정도의 미열이 지속되고

흉부 엑스레이에서는 우측 폐 하엽에 경계가 불투명한 흰색 음영이 있었다.

혈액검사에서도 약간 상승된 백혈구 수치, CRP 5 정도로 염증 수치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경증의 바이러스성 폐렴에 합당한 검사 소견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환자는 사 결과와 증상에 비해 훨씬 더 기운이 없는 모습이었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는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울고 있는 것인지 가끔씩 접은 휴지를 꺼내

닦기도 했다. 폐렴의 증상과 검사 결과가 너무 교과서적이라는 점이 오히려 내 직감을 자극했.

너무 교과서적인 병은 대개 뒷면에 교과서에 실리지 않는 어떤 사유를 숨기곤 했기에

그녀의 상태를 단순히 젊은 환자가 초기에 치료 시기를 놓쳐 악화된 폐렴이라고 치부하기가

어려워 경증의 환자임에도 하루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물론 나는 이런 환자를 수도 없이 겪어왔고 며칠간의 투약이면 증상이 호전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녀의 병은 전이 대상은 아니었다.

30분 정도 지나자 그 마음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가벼운 장염 증상으로 온 병원 원무과 직원

강도훈이 내원했기 때문이다. 병을 전이시켜 심판할 정도의 악인은 아니었으나 그의 화려한

여성편력은 원내에서도 자자했고 그와 사귀면서 마음고생을 한 병원 여직원들이 여럿이었다.

그리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경박함도 결정에 한몫을 했다.


경증의 병이니 며칠 고생이나 하라는 생각으로 최서윤 환자의 병을 내 몸으로 옮겼다.

강도은 전날 먹은 음식을 통해 아마 노로바이러스 장염에 걸렸을 것이다. 며칠 설사하고 복통이

있겠지만 약 먹으면 2~3일 내로 호전이 될 것이다.


포도당 수액을 오더하고 정맥라인을 잡는척하며 그녀의 폐렴을 전이시켰다.

평소 언행과 행실에 대한 가벼운 벌을 준다는 생각이었다. 정맥 수액치료와 한 번의 투약으로

그는 금방 호전되어 응급실에서 퇴실하였다. 아마 곧 기침과 발열로 다시 오게 될 거다.


퇴근 전 최서윤 환자가 누워있는 침상으로 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청진에서 여전히 들리는 수포음과 그리고 몰아서 해대는 기침과 미열이 여전했다.

"퇴원하고 싶어요. 답답하네요"

내원 한 이후로 항상 그렁거리는 눈이었는데 컨디션이 회복되려는지 눈동자는 밝아보였다.


최서윤은 3일 뒤 예정인 호흡기내과 외래 진료 약을 하고 퇴원을 했다.

다음날 병원 식당에서 마주친 강도훈은 호전되어 보란 듯이 먹성 좋게 먹고 있다

"제 몸이 건강체질이라 금방 나았네요"

보통 사람이라면 빈말이라도 덕분에 좋아졌다고 말할 텐데 역시나 도훈다웠다.

기침, 발열등의 호흡기 증상은 없는듯했다.

"다행입니다. 다른 불편함은 없나요?"

"네 멀쩡합니다"

오답이다. 그건 내가 원하던 답이 아니다.


며칠 후에 최서윤은 호흡기내과에 왔고

응급실 퇴원 후에도 여전히 기침과 미열로 며칠은 힘들었다고 했다.

증상은 남아 있으나 응급실에서 그녀가 초점 없는 눈으로 창가를 바라보던 축 늘어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활기찬 모습이었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참 이상하네요. 그때 응급실에 왔던 이후로..."

뜻 모를 이야기를 하고 병원을 떠났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이번에도 최서윤의 병은 내 몸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당연히 강훈에게도 전이가 되지 않았으니 에게 호흡기 증상이 생길 리가 없었다.

며칠 뒤 는 최서윤의 회사 근처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최서윤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다. 그 최서윤을 알지 못한다.

같은 시간에 응급실에 같이 있을 때 둘은 확실하게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도 그 퇴근 이후에 자주 최서윤의 회사 근처를 서성였다.

지나치면서 본 그의 눈빛은 왠지 응급실에서 보던 최서윤의 눈빛과 많이 닮아 있었다.

어딘지 모르 허공을 응시하는 초점없는 눈빛과 촉촉하게 젖어있는 눈.

분명 최서윤과 연관된 것이 있을 것인데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최근의 전이 양상의 복잡성을

생각해 보면 내가 모르는 엇인가가 분명히 있다.


최서윤이 퇴원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람의 감정이란 것이 참 이상하네요. 그때 응급실에 왔던 이후로..."

나는 최서윤에게 그 뜻을 물어보고 싶었다.

우연히 최서윤을 만난 것처럼 먼발치에서 그녀를 나오길 기다렸다.

오늘도 강도훈은 역시 최서윤의 회사 앞에서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최서윤을 건물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서둘러 다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최서윤 씨?"

" 어 선생님. 안녕하세요." 다행히 그녀는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 많이 좋아졌어요"

그녀는 이제 완전히 회복을 한 상태였다.

" 물어볼 있어서요. 그때 하신 말씀이 궁금해서 실례가 안 된다면..."

" 아 그때 얘기요? 좀 시간이 걸리는 얘기니 자리 옮겨서 말씀하실까요?"


그녀와 나는 3분 거리에 있는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고 나는 그때의 그녀의 눈빛, 눈물

그리고 그녀가 말했던 응급실 내원 이후의 감정이 이상하다고 말했던 이유를 물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하루아침에 자신을 힘들게 하던 감정이 사라져 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랬다.

그녀는 입사 이후로 줄곳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자상한 선배에게

걷잡을 수 없게 마음을 뺏고 했다. 그에 대한 짝사랑은 점점 커져만 갔고

응급실 내원하기 보름 전,

그 선배의 결혼식 후로 그 열병은 절정에 달

터질 듯이 커져만 가는 그를 향한 마음에 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그럼 와중에 기침이 심해지고 열이 나서 응급실에 오게 된것이었다.

그런데 폐렴으로 응급실에 온 다음날부터

갑자기 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고 했다.


그날 그녀의 몸을 갉아먹던 것은 폐렴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에 객담보다 끈적하게 달라붙어

뱉어지지 않는 말할 수 없는 그리움과 무력감과 자책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병리적 증상에 가려져 그녀의 삶 전체를 잠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폐렴이라는 육체적 병은 감정의 고통이라는 무게에 깔려있었다.

전이에 실패한 이유의 모든 조각이 한 번에 맞춰졌고 나는 결국 전이가 단순히 표면의 병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지능을 가진 존재처럼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가장 무거운 병을 스스로 선택해 전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전이하려고 의도했던, 눈으로 보이는 폐렴 대신 그보다 훨씬 더 질기고 강한

마음의 고통이 다른 몸으로 흘러들어 갈 길을 찾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른 몸은 지금 최서윤의 회사 앞에서 서성거리는 로 그. 강도훈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가 오래 품어온 열병을 자기 안에 품게 되었.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향해 숨이 막힐 정도로 애타게 변해가는 그를 보며 내가 행한 일이

단순한 의학적인 벌이 아니라

한 인간의 정체성과 삶의 궤적을 흔들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깨달음은 동시에 나 자신의 행위가 지닌 윤리적 무게를 더욱 무겁게 느끼게 했다.


그가 사랑하게 된 대상은 바로 그녀가 오랫동안 마음속에 비밀처럼 숨겨왔던 그 선배였.

그 남자를 그리는 그의 눈빛은 이전의 거만이나 건방짐는 전혀 다르게

불안과 갈망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고 그로 인해 그의 밤은 불면으로 가득 차고

얼굴도 모르는 대상의 남자에 대한 짝사랑으로 점차 그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득했다.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은 좋았지만 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옮긴 것은, 병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며 그이 이후로도 눈에 보이는 병 대신 전이되어

징벌 이상으로 타인의 삶을 망가뜨리거나

그들에게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상처를 줄 가능성 때문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도 상황을 관망했고, 밤마다 응급실의 불빛 아래서 차트를 들여다보며

혼자 오래 생각에 잠겼다. 내 행위의 정당성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려 했던 수많은 날이 떠올랐다.

그 정당성은 때로는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규칙들이 완전한 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밤의 공허 속에서 전이라는 능력 자체의 윤리적 경계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악인에게 병을 옮기는 것이 정의라면 그 결과로 생겨나는 감정적 파국도 정의의 일부 아니냐고,

그러나 내가 목격한 것은 단순히 벌과 보상의 공식이 아니라 여러 삶들이 얽히고설켜

의도치 않은 고통과 회복이 동시에 발생하는 장면이었고, 그 무대 위에서 나는 관여자일뿐 완전한

설계자는 결코 아니었다는 그 사실었다. 그것이 나를 두렵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단순히 질병을 전이하는 의사가 아니라

한 인간의 감정의 고통 그 자체를 다른 이의 몸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더 위험하고 더 깊은 방식의

개입자가 되어버렸음을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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