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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망가졌습니다.

by 짧아진 텔로미어

무사히 망가졌습니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의자를 낮추는 일이다.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서 묵묵히 일어나는 붕괴를 받아 적는 일.


매일 몸의 한 조각을 꺼내 식탁 위에 올린다.

눈물보다 오래 증류된 하루가 짭짤하게 농축된 시간.

아이들은 다른 방을 향해 자라고,

나는 벽돌을 쌓아 스스로 쉴 수 없는 마음을 만든다.

현관 앞 신발은 서로를 오해한 채 놓였다. 어긋난 발끝만큼 굽이 닳은 거리감.


마음에는 켈로이드 같은 상처가 자라고, 약 봉투는 하루를 나누는 시간표가 된다.

이른 아침, 점심, 저녁.

식후 30분. 그 시간에만 정확해지는 나의 존재감.


숨을 고른다는 건 타인의 호흡을 먼저 읽는 일.

간병이라는 말은, 간(肝)을 쓰는 일일지도 모른다.

윤리란, 때로 자기 파괴를 수선하는 테이프.


문득 내 이름을 세탁기에 돌리고 싶어진다.

너무 오래 써서, 향기 하나 없이 때가 탄 이름.

‘家長’


감정은 짜지 않고 털어 말린다.

이제 눈이 아니라 뼈의 위치를 읽는다.

식탁에 꺼내 하나씩 비워진 자리의 공허를 읽는다.

나를 닮는다는 건 속이 비었다는 뜻이고,

무릎이 아파진다는 뜻이며, 침묵이 길어진다는 뜻이다.


말하면 무너질까 봐,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까 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자주 다치고 돌아오는 이름은 무사히 망가졌다는 뜻이다.

지금도 여기 있다는, 희미하지만 단단한 증거 같은 것.


팔꿈치의 무게에 눌린 식탁이 기운다.

기운 눈빛이 묻는다. 오늘의 나는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나를 사등분한다. 아내, 자식, 부모, 나.

점차 얇아지는 나.


가끔 울고 싶다는 건

줄어든 내 몸에 더 이상 감정이 없다는 뜻이다.


그건 이름이 세탁된 가장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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