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의 작은 소도시에 새로운 일본군 장교가 부임하였다.
그의 이름은 타케다 슌지.
차가운 군복 아래 숨겨진 그의 심장은 섬세한 감수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밤마다 관사(官舍)의 희미한 등불 아래서 조선의 정취를 담은 시를 읽거나
펜을 들고 마음 속 울림을 시로 쓰곤 했다.
하지만
낮이 되면 그는 일본제국 군인이라는 제복을 입고
독립의 불씨를 꺼뜨리라는 명령에 따라 조선인들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했다.
눈빛이 차가워질수록, 그의 영혼은 괴로워했다.
같은 마을, 대대로 내려오는 낡은 서당 훈장의 딸 윤서는 조용하지만 강인한 여자였다.
그녀는 낮에는 어머니를 도와 일을 하고 밤에는 붓을 들어 독립을 향한 염원과 시대의 고통을
시(詩)로 승화시켜 독립운동을 고취시켰다.
그녀의 시는 곧 민족의 노래이자, 억압된 영혼의 울음같았다.
그녀는 비밀리에 독립운동 단체의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시를 통해 동지들에게 희망을 전했다.
보름달이 밝게 뜬 어느 밤
윤서는 시를 적은 종이를 접어 마을 외각의 인적이 드문 느티나무에 묶었다.
쪽지에는 사랑의 시가 적혀 있었다.
대상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지만 고독한 영혼이 속삭이는 듯한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강물에 달빛을 띄웠는데
언제쯤 그대 어귀에 도착할까요
닫힌 문틈으로도 매화향이 스미듯
구비구비 향기로 가득할거외다
며칠이 지난 새벽, 윤서는 다시 느티나무를 찾았다.
쪽지는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쪽지가 조심스럽게 묶여 있었다.
누군가의 답시(答詩)였다.
달빛 품은 강물이 어귀를 돌아갑니다
누구 얼굴인지 잠긴 달을 건져 바라봅니다
매화향이 진동하거들랑
그대 문을 두드리는 내 마음으로 여기소서
윤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의 필체는 힘차면서도 부드러웠고, 그 감수성은 그녀의 시와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그녀는 미지의 존재에게 매료되었다.
그날부터, 느티나무 아래는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장소가 되었다.
윤서가 한 소절을 적으면, 슌지가 다음 소절로 화답하였고 오래지 않아
그들의 시는 곧 한 편의 장편 서사시가 되어갔다.
시대의 고통과 인간적인 고독,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사랑이
담긴 시였다. 마침내, 시는 완성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소절을 적어 내려간 윤서는 쪽지 끝에 짧은 글귀를 덧붙였다.
시가 완성되면, 이 느티나무 아래서 나흘후 보름 저녁, 달이 가장 높이 떴을 때
서로 얼굴을 뵙기로 하지요.
약속 당일, 윤서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가장 고운 한복을 차려입었다.
시를 통해 깊이 교감한 그 영혼은 분명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라 믿었다.
설레임으로 가득차 쿵쾅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느티나무가 있는 숲 어귀에 도착했을 때
멀리서 굳은 표정으로 느티나무 쪽을 응시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분명히 그녀의 시에 답했던 그 사람임이 분명했다.
반가움에 가까이 다가가려던 순간, 윤서는 숨을 멈추고 꼼짝할수 없었다.
그는 며칠전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을 거칠게 끌고 오는 일본 순사의 맨 앞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던 사람. 번쩍이는 일본도(刀)를 찬 일본군 장교. 타케다 슌지였다.
그가 바로 느티나무 아래에 서 있던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시로 깊은 교감을 나누었던 미지의 시인(詩人)은 다름아닌 그녀의 조국을 짓밟는
압제의 상징인 일본군 장교였다.
그녀는 숨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가슴속에서 시로 빚어진 아름다운 세상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서 그녀는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사랑과 증오, 동경과 절망이 뒤섞여 그녀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슌지는 한참을 기다리다 잠시 느티나무를 쓸쓸하게 바라보고는 자리를 떴다.
윤서는 그날 밤 이후로 그 곳에 갈수 없었다.
다음 날 슌지는 마지막 쪽지와 함께 아무도 나타나지 않은 느티나무 앞에서
한동안 서 있다 텅빈 허전함만 안고서 발걸음을 돌렸다.
죄책감과 슬픔으로 며칠 밤을 지새우다 며칠 후, 윤서는 다시 느티나무를 찾았다.
그리고 마지막 쪽지를 묵어놓았다.
그녀의 쪽지는 답시가 아닌, 그녀의 마음을 담은 마지막 눈물같은 것이었다.
저는 그 약속 장소에 갔으나 나서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나의 사랑이었지만
강물은 강물로 돌아가야 하고,
달빛은 달빛을 지켜야 하는 슬픔을 알았습니다.
부디, 당신은 당신 자리에, 나는 나의 길에...”
그녀는 쪽지를 매달았다.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다고, 시대가 가른 이 비극을 인정하겠다고 다짐하며 돌아섰지만
마음이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강렬하게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거부한 것은 슌지라는 사람이 아니라, 둘을 둘러싼 시대였다는 것을
시로 교감했던 그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녀가 마주한 현실의 절망보다 훨씬 더 깊고 강하게
그녀의 가슴에 뿌리내렸다.
다음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