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2화

by 짧아진 텔로미어

시(詩)- 2화



윤서가 마지막 쪽지를 매달고 간 다음 날 타케다 슌지는 다시 느티나무 왔다.

지난밤 약속 장소에 그녀는 오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찾아온 그는 그녀 대신 가지에 묶여있는 마지막 쪽지를 보았다.

푸른 잎 사이로 더욱 하얗게 보이는 쪽지가 나뭇잎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슌지는 음 쪽지를 발견하던 날을 떠올렸다.

느티나무는 마을 어귀에서도 한참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서 있었다.

길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흙길이 끝나는 자리에 그 나무는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타케다 슌지가 처음 그 나무를 본 것은 부임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였다.

순찰 동선에 포함된 곳도 아니었고,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날따라

마을의 소음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귀를 파고들어 목적 없이 걷고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바람이 불어도 잎사귀가 한꺼번에 흔들리지 않았고,

슌지는 그 고요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무심코 줄기에 손을 얹은 그때였다.

나무의 낮은 가지 하나에, 작은 종잇조각이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 배어있는

그 종이는 실로 묶 채 향을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그는 주변을 살폈만 인기척은 없었다.


슌지는 그때일을 떠올리며 그녀의 마지막 쪽지를 읽고 가슴이 무너 내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심지어 얼굴을 본 적도 없는데

오로지 시구절로만 감정을 깊게 공유하며 어느덧 그녀를 깊게 사랑해 버린 까닭이었다.


'당신은 나의 사랑이었지만....'

이 구절이 계속 그의 심장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는 듯 가슴이 쓰렸다.

제복을 입지 않았음에도 녀가 자신을 알아보았고, 일본인 그것도 군장교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날 약속장소에 왔음에도 다가가지 않았다는 명백한 거절 담긴 쪽지.


슌지는 자신이 누구인지, 이 시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조선 여인과의 사랑을 꿈꾸는 일이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거절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펜을 들었다. 자신 또한 괴로운 시대의 짐을 지고 있음을, 시를 나누던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는 것을 전하고 었다.


강물은 끝내 바다를 향해 흐르나니

그 길 위에 놓인 수많은 슬픔을 어찌 피하랴.

다만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소.

이 제복이 나의 영혼은 아니었음을.

나는 영원히 이 나무 아래, 당신의 시인(詩人)으로 남을 것이오.


슌지는 이 답시를 조심스럽게 느티나무 줄기에 꽂아두고는,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시는 완성되지 못한 채, 영원한 미완의 비가(悲歌)로 남았다.


그 후, 마을의 일본군 감시는 더욱 삼엄해졌다.

그는 실의에 잠겼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업무 처리는 더욱 냉철하고 잔혹

조선인들을 더 거칠게 다루었고,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건 자신의 괴로움을 잊으려는 자기 파괴적인 방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슌지는 상부로부터 중요한 지시를 받았다.

마을의 서당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독립운동 단체를 소탕하라는 명었다.

특히, '달빛'이라는 암호명을 쓰는 연락책 여인을 반드시 체포해야 한다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곧바로 서당 주변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낡은 서당 마당에서, 여인이 햇빛 아래 빨래를 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그녀가 빨래를 너는 섬세한 손동작을 보 순간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다.


그녀는 상상하던 모습 그대로였고 눈빛은 그가 시에서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달빛'이라는 암호명, 그리고 서당. 그리고 그녀의 집 마당 귀퉁이에 작게 피어있는 매화나무...

그녀의 첫 시 소절에 담겼던 매화향과 달빛이 떠르자 슌지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그가 잡아야 할 '달빛'이 바로, 그의 영혼을 매료시켰던 녀이었던 것었다.


그날 밤, 슌지는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손에는 체포 명령서와 윤서가 썼던 시 쪽지가 동시에 들려 었다.

'당신은 나의 사랑이지만....'

글귀가 그의 귓가에 끊임없이 울렸다.


슌지는 그녀를 체포해야 할 일본인 장교로서의 의무와

그녀를 지켜야 할 '시인'의 영혼 사이에서 처절하게 갈등했지만 결국 슌지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자신이 조선에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아름다운 영혼을, 스스로 짓밟을 수 없었다.

그는 일부러 서당 주변의 순찰을 늦추고, 감시망에 일부러 허점을 만들

혼자 어둠이 깊어진 서당으로 향며 생각했다.


'그녀를 만난다면, 그녀는 나의 얼굴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증오? 절망? 아니면... 시를 나누었던 애틋함?

다케다 지는 처음이자 마지막로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시가 아닌 현실의 언어로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