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마당에 볕이 들기 시작한 것은 해가 중천에 이르러서였다.
윤서는 물이 담긴 대야를 마당 한가운데 끌어다 놓았다.
물 위로 하늘이 잠시 비쳐 보였다가 옷가지를 적시는 그녀의 손이 닿자 잔물결로 흩어졌다.
빨랫감은 많지 않았다. 서당에서 쓰는 행주 몇 장과 옷가지 몇 벌이었다.
윤서는 젖은 천의 물기를 짜며 잠시 숨을 고르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래줄에 널었다.
천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펄럭이는 소리가 좋았다.
귀를 기울이면 마치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도 그리고 누군가의 숨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마당 귀퉁이에는 작은 매화나무가 있었다. 꽃은 이미 졌고, 잎만 남아 있었다.
윤서는 무심코 그쪽을 바라보다가, 잠시 손을 멈췄다. 꽃이 없어진 자리는 늘 비슷했다.
느티나무의 풍경과 비슷했다.
윤서는 서당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종이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아직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은 종이였다.
그녀는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 날 이후로는 시를 쓰는 일이
곧 아픔이었기 때문이었다.
서당 밖에서는 발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순찰이었다.
예전보다 잦아진 것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두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윤서 그리고 달빛. 그 어느 것도 그녀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달빛'의 신분으로 그녀가 오늘 전달해야 할 것은 많지 않았다.
다음 회합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말 몇 마디면 되었다.
윤서는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다시 정리하고 적어 내려갔다.
잠시 후, 서당 문 앞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느껴지는 기척으로 알수 있었다.
해가 기울자 서당 마당의 그림자는 길어졌다.
낮 동안 말려 두었던 옷을 걷어 들이며 마당 너머에서 발소리를 들었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군화의 소리는 아니었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로도, 다가오는 사람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무게가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기척은 있었으나 말은 없었다.
그날 밤, 달은 구름에 가려 유난히 어두웠다.
슌지는 발자국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
문틈으로 보이는 그녀는 희미한 달빛에도 여전히 낮에 보았던 것처럼 아름다웠다.
발자국 소리를 죽이면서 왔지만 그녀는 이미 밖의 기척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달빛처럼 고요한 표정이었다.
슌지는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숨을 죽이고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어둠속에서도 그를 바로 알아챘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일본군 장교, 타케다 슌지였다.
밤마다 그녀의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도 자꾸 새어 나와 매화향처럼
그녀의 방을 가득 채우던 바로 그였다.
"잠시 들어가서 드릴 말이 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짧지만 강렬하게 느티나무 아래서 나눈, 수많은 시구(詩句)처럼 눈빛을 교환했다.
말하지 않아도 침묵 속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시인이었음을 그리고 동시에 지금은
서로의 시대적 적(敵)임을 눈빛으로 말했다.
"어찌... 여기에."
윤서의 목소리가 떨렸다.
슌지가 낮게 속삭였다.
"그 날 느티나무 아래에서 오지 않는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윤서의 마지막 쪽지를 꺼내 보였다.
"당신이 그 날 나서지 못한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목소리를 더욱 낮추고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의 단체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곧 시작됩니다.
내일 새벽, 내가 직접 이 서당의 수색을 지휘하게 될겁니다."
그의 눈빛은 고통으로 일렁였다.
"당신이 '달빛'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체포해야 합니다."
윤서는 이를 악물었다.
"당신은... 군인이니까요. 당연히 명령에 따라야겠죠."
그녀의 말에는 증오 대신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아닙니다."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쓴 시를 너무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리도 당신도...
잠시였지만 나에겐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합니다. 나는 나의 영혼을 배신할 수 없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시간을 주러 왔습니다."
그는 품속에서 미리 작성해 둔 문서를 꺼내 윤서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것은 이 지역의 순찰 계획표입니다.
당신의 동지들에게 이 정보를 전달하고, 오늘 밤, 무조건 이 마을을 떠나십시오."
"당신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윤서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움켜쥐었습니다.
"나의 마지막 답시는....
'나는 영원히 이 나무 아래, 당신의 시인으로 남을 것이오'였습니다."
슌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나는 내일 당신을 잡지 못한 죄로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이 시대의 형벌이라면,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당신과의 시간은... 이곳에서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나는 영원히 당신의 시인으로 남겠습니다"
윤서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가 보고 있는 사람은 적국의 장교가 아닌, 자신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려는 순수한
한 시인의 모습이었다.
"당신에게 죄를 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윤서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닙니다."
슌지는 그녀의 손을 살짝 쥐었다가 놓았다. 따뜻함이 손을 타고 올라왔다.
"이 온기가 당신과 나, 시인들 사이의 마지막 시입니다.
나는 당신의 투쟁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시는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가 할수 있는 마지막입니다."
그는 속삭이듯 말을 뱉어냈다.
"부디... 안전하십시오, 나의 시인."
슌지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돌아서 갔다.
윤서는 문이 닫히고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순간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서둘러 동지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마을을 떠날 준비를 했다.
떠나기 직전, 윤서는 자신의 방을 둘러보았다.
붓, 먹, 그리고 이제 영원히 간직해야 할 슌지의 마지막 답시가 담긴 쪽지...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결연한 눈빛으로 어둠 속으로 나섰다.
타케다 슌지는 다음 날 새벽,
일본 순사들과 서당을 급습하였으나 이미 서당은 텅 비어 있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상부의 조사 끝에 명령을 어긴 죄로 체포되어 조선 총독부
내부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자신이 잃은 것은 계급과 명예였지만,
대신 영혼의 순결함을 지킬 수 있었다고 굳게 믿었다.
다음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