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드디어 오늘이네요. 많이 설레시죠?"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손녀 지수가 두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을 걸어왔을 때
윤서는 이미 몇 번이나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했다.
혹시라도 빠뜨린 것은 없는지 확인하며 이른 새벽부터 분주히 움직이던 윤서의 기척에
덩달아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수개월 전부터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었으니 그럴만했다.
공항까지는 시간적으로 넉넉한 여유가 있었지만
어스름한 도로 위를 스쳐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이 간간이 유리창에 비치는 이른 시간에
윤서의 마음은 이미 도착지에 먼저 가 있는 듯 조급하게 앞질러가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어젯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오래전 얼굴들과 이름들이 하나둘 떠올랐고, 그 기억들이 서로 그녀를 불러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세 달쯤 전이었을까,
집 안을 가득 채우던 적막을 깨고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대한민국 외교부 ○○입니다.
혹시 ‘달빛’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던 윤서 선생님이신지요?"
"네 맞습니다"
"독립 50주년을 맞이하여 다가오는 삼일절에 국내외에 계신 독립운동가 분들을 모시고
기념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국에 자리 잡고 살아온 지 어느덧 오십년.
꽃다운 나이가 화살처럼 지나가고 이제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 전화 한 통은 그녀의 시간을 다시 과거로 되감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올릴 때마다 윤서의 머릿속에는 늘 비슷한 풍경이 먼저 다가왔다.
낮은 서당 담벼락 너머로 보이던 마당, 그 마당을 가로질러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늘어져 있던 빨랫줄.
그 곳에서 바람에 흔들리던 옷들.
마당 구석의 매화나무와 방문으로 깊숙이까지 배어들던 매화 향기까지.
그 어느 풍경을 떠올리던지 언제나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인적이 드문 산길에 서 있던 느티나무, 쪽지를 몰래 묶어 두던 가지,
그 아래에서 나누었던 말보다 더 많은 침묵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던 타케다 슌지의 마지막 눈빛과
전율처럼 손을 타고 오르던 따스했던 슌지의 온기.
그 모든 것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번 방문 일정 중에서 그녀의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한 것은
서대문 형무소 견학이었다. 독립운동을 하다 끌려간 동지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송두리째 빼앗긴 채 고통을 겪었던 곳,
그리고 그 동지들 사이에 존재했던 유일한 일본인, 타케다 슌지가 수감되어 있었던 감옥.
그 공간을 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윤서의 가슴은 서늘해졌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떠오르자 창밖의 집들과 도로가 서서히 작아졌다.
몇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 그 짧은 거리를 건너오는 데 그녀에게는 무려 수십년의
시간이 걸렸다.
슌지와의 작별 이후,
윤서는 북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독립운동의 거센 흐름 속으로 몸을 던졌다.
‘달빛’이라는 암호명은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지탱하게 해 주는 희망의 이름이 되었고,
그녀는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목숨을 건 연락 임무를 수행하였고
홀로 남겨진 밤에도 시를 적는 펜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 시들은 더 이상 느티나무 아래에서 나누던 사적인 교감이 아니었지만
잃어버린 인연과 그 인연이 남긴 희생에 대한 연민이 항상 물씬 배어 있었다.
성대하지만 차분하게 마무리된 삼일절 행사를 마치고 이어진 서대문 형무소 견학시간.
윤서는 서대문 형무소의 회색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동지들의 신음 소리가 바닥에 남아 들리는 듯했다.
벽은 생각보다 두꺼웠고, 햇빛이 들지 않는 창은 지나치게 작아 빛은 창살의 격자무늬에
걸려 들어오지 못할듯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의 길이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고통을 견뎌냈다는 사실은, 설명 없이도 공간 전체가 말하는듯했다.
그녀는 어느 호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안내판에는 무심하게 숫자와 간단한 설명만이 적혀 있었지만,
윤서의 시선은 그 아래, 당시의 벽 한 면을 찍어 사진으로 보관 중인 액자로 옮겨갔다.
지금의 벽은 새로 보수가 되어 옛 흔적은 지워지고 없었지만 사진은 그 시간을 정지시켜
윤서에게 보여주는 듯했다.
돌로 긁어 새긴 듯한 글자들,
중간중간 닳아 없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덧그려진 흔적들.
누군가가 밤마다 손바닥만 한 어둠 속에서 시간을 쪼개어 새겼을 구절이었을 터.
가까이 다가가 첫 구절을 읽어 내려가던 윤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음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