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에도 덥지만
게으른 완벽주의자. 오** 박사가 말하는 캐릭터가 아들과 흡사하다. "집에만 오면 누워있는 사람들은 게으른 게 아니래. 게으른 완벽주의자란다"라고 문자를 보내니 아들이 "ㅜㅜ"라고 답한다. "아니이~ 일처리를 확실하게 하려고 궁리하는 긍정적 캐릭터래." 한참 뒤에 답이 온다, 'ㅎㅎ'. 근검과 절약이 늘 미덕이 아니듯 게으름도 반드시 경계해야 할 태도는 아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때, 함께 서예를 시작했다. 퇴근하고 서실에 가면 여자 회원들뿐이었다. 선생님도 여자였다. 저녁밥 지을 시간이 되면 여자 회원들은 벼루를 닦고 할머니 한 분이 늦게까지 먹물 냄새를 풍겼다. "송 선생. 김 여사 있잖아, 냄비가 시커멓더라." 냄비가 반짝반짝하지 않다는 말은 게으르다는 뜻으로 들렸다. 김여사가 자기 집 냄비를 힘들여 닦지는 않아도 서실 총무로서 역할은 깔끔했다. 내 발이 저려 얼른 자수했다, "할머니, 저도 집안일에 게을러요." "선생은 그래도 괜찮다. 김 여사는 주부잖아."
올여름은 작년보다 더 덥다. 문마다 활짝 열고 물을 뒤집어쓰고 선풍기를 돌린다. 밤에는 에어컨을 잠시 켠다. 손님 접대용이던 에어컨이 올해는 나의 전용이다. 에어컨 덕분에 고희가 쾌적하게 책 읽고 청소하고 TV도 본다. 덥다고 게을러지는 고희보다 적당히 냉방하고 움직이는 할멈이 경제적이지 않은가. 뽀송뽀송한 고희가 실리적이지 않은가.
입추 아침, 덥다고 미루던 산책길에 나선다. 봄에 연둣빛이던 해송은 짙어지고 소나무 그림자도 봄보다 길다. 느릿느릿 30분 걸어서 솔숲 나무의자에 눕는다. 바람은 솔솔 불고 구름은 게으르게 움직인다. 뾰로롱 뿅뿅, 더우면 새도 소리를 아끼나? '짜증은 내어서 무엇하나 성화를 내어서 무엇하나' 태평한 마음이 올라온다. 입추 무더위에도 적당히 행복하다. 소확행 여름, 라곰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