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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Aug 10. 2020

[독서노트] 중국 민족주의와 홍콩 본토주의

- 홍콩역사박물관의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류영하 지음, 산지니)


대만에 교환학생으로 가서 공부를 하던 2년 전, 같은 학교에서 역시 교환학생 신분으로 만난 홍콩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학기가 다 끝나도록 중국 본토에서 온 친구들과는 한마디 말도 섞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한국인 교환학생들은 모두 보통화(표준 중국어)를 썼고, 홍콩 친구들도 한국인과 대화할 때는 보통화를 썼다. 다만 자기들끼리의 대화는 시종일관 광동어였다. 나는 이와 같은 언어 불일치가 단순히 학습된 표준어와 체득한 모어(또는 집안말이랄까) 사이 심리적 거리감 때문인 줄만 알았다. 관광지에서 세 명의 홍콩 친구들이 일제히 절벽 위에 세로로 쓰인(아마 장개석 정부 시절 누군가 새겨놨을) '멸공복국(滅共復國, 중공을 멸하고 국가를 되찾자)' 네 글자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한참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중국과 홍콩이 누구에겐 단순히 국가와 도시 관계가 아님을 느꼈다.


저자는 본문에 앞서 스스로 '세계주의자'임을 서문에서 자처한다. 어느 국가이던지 정체성을 강화하려다 보면 다른 문화 흐름이 들어오는 길을 막고 배타적으로 변할 뿐 아니라, 내적으로는 표면 위로 드러나지 못한 수많은 정체성들이 묵인되고 억압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이 주장은 서문에 이어 1998년 개편된 홍콩역사박물관이 간과하고 있는 맹점들을 곧바로 지적하는 제2부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제일 먼저 조지 E. 버코가 가리킨 대로 박물관 전시란 "중요한 목적, 어쩌면 교육적 효과를 성취하기 위해 사물을 무리 지어 무엇인가 의미를 추가한다는 개념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소개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하여 1997년 주권반환 이후 즉시 이전 및 개편된 홍콩 박물관이 중국인민공화국 정권에 의한 정치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어쩌면 당연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박물관이 처음 건립된 1975년은 영국 식민정부 치하였으며, 주권이 바뀜에 따라 박물관 전시물에 내포된 '개념'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98년에 박물관이 시청에서 침사추이로 이전됐고, 2001년 8월 시정국 박물관위원회에서 구성한 '홍콩 스토리(香港故事)'에 따라 개편된 박물관이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홍콩역사박물관 로비

그러나 박물관의 홍콩 스토리는 불필요하게도 4억 년 전, 그러니까 홍콩은 고사하고 인류가 탄생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또한 저자는 친완(陳雲) 교수의 말을 인용하며 송(宋)대로부터 이주해 온 신계 지역 부락이나 사실상 문명적 특징이 안 보이는 원시 수렵 생활에 관한 설명은 상세한 반면, 영국 점령 후 일어난 67 폭동(열악한 노동환경에 항거하여 홍콩 전역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으로, 시위는 6월 총파업과 좌익 단체의 테러 등으로 확대되었다)이나 천안문사건에서 파급된 6.4 민주화운동(천안문 사태에 대해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며 홍콩 각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으로, 홍콩 반환을 앞두고 이 사건으로 반중 정서가 심화됐다) 등은 간략하고 모호하게 처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박물관 관장이 직접 구상했다는 다큐멘터리는 10분을 넘지 않으며, 이 짧은 영상은 56년의 쌍십폭동(중화민국 건국일인 10월 10일에 시민이 게양한 중화민국 국기를 떼 버린 정부 직원에 항의하며 발생한 폭동)과 67폭동, 6.4 민주화운동 같은 사건을 중국은행 설립, 카우룬-광저우(홍콩-대륙) 간 철도 개통과 같은 일화와 한 데 욱여놓고 있다. 대륙의 역사로 어떻게든 홍콩을 끌어들이려는 것이다.

67폭동 당시 총독부 앞에서 시위 중인 좌익단체 연합

또 다른 각도에서는 영국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가 문제로 제기된다. 박물관이 전시하는 서사에 따르면 아편전쟁에 대한 전시실 하나가 독립될 정도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악랄함 및 홍콩 할양의 부당함이 비중 있게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기 직전까지 홍콩 스토리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던 화인(중화민족)들의 움직임을 신해혁명과 5.4 운동이라는 큰 맥락 안에서 서술한다. 이 서술 속에 가려진 사실은 신해혁명을 주도한 쑨원(孫文)이 서구 문물을 처음 접촉한 시기가, 박물관 책자의 내용대로 홍콩이 아닌, 하와이였다는 점, 그리고 만일 박물관의 설명대로 '그의 혁명 사상이 홍콩의 (개화된) 교육으로부터 계몽을 받았다'면 영국통치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된다는 점이다.

쑨원에 대한 평가가 다양해지고 있다: 봉건주의를 무너뜨리고 근대화를 일으킨 국부인가, 혹은 한족 중심 민족주의를 내세운 배타주의자인가

반면, 1945년 9월 16일 일본으로부터 영국이 홍콩 주권을 다시 찾은 사건을 박물관은 중광(重光, 빛을 다시 찾음)이라 표현한다. 아편전쟁과 5.4 운동 등의 반제국주의적 사건으로 중국과 홍콩의 동질성을 확인하는 작업이 중국 민족주의에서 이뤄졌다면, 사실상 쑨원이 바랐던 민족 주권을 획득하지 못하고 영국에 탈환된 '중광'에서 시작해서, 중국 대륙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는 작업은 홍콩 본토주의에서 이뤄진 것이다. 작게는 일본 점령 전 홍콩 영국 정부에 의한 첫 우체국 신설부터, 한 마디 비판점도 적지 않은 역대 영국령 홍콩 총독들에 대한 소개글, 50년대 말 관광업 발전과 6,70년대 공업 발전을 위시한 '홍콩식 자본주의'에 대한 자랑에는 어떠한 민족적 우수함이나 영국정부에 항거하여 얻어낸 시민(citizen)의 성취가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67 폭동 당시 전례 없는 규모의 노동 총파업으로 영국이 홍콩에 관해 불간섭주의와 전반적 사회개혁을 단행했음에도 이 사건들은 '홍콩 스토리'에서 재난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결국 저자는 중화인민공화국 통치 하에, 나아가 영국이든 어디에든 복속될 수밖에 없었던 홍콩의 처지를 고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가 개인적으로 홍콩에 유학하며 살았던 시기와 당시 화려했던 홍콩을 추억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나 정말 저자의 말대로 세계주의가 실현되고 다양한 정체성이 어떤 억압도 없이 공존할 수 있는 최후의 시험대이자 보루를 홍콩으로 생각한다면, 역설적으로 그것은 저자가 되려 비판했던 영국 정부가 중영공동선언 이후 20년이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작정하고 자유(로 보이는 정부시책과 분위기)를 심어준 까닭이 아닐까. '국가 없음'에 대해 고민하는 본토주의는 7,80년대 홍콩에서 잇달아 일어난 시민운동과 영국 정부의 온건주의에서 나온 바, 그 역사가 매우 짧다. 7월 1일 발효된 국가보안법(또는 国安法)으로 지금 홍콩은 거의 일국양제를 잃은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정체성 억압의 역사는 지난날의 역사를 봐도 어차피 있을 것이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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