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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Aug 17. 2020

詩, 세계를 짓는 또 하나의 방법-2

영화 <패터슨> 평론


(1장에서 계속)


2. 운율, 인식적 언어에서 창조적 언어로


운율은 <패터슨>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스크린에 띄워지는 시들은 물론이며, 패터슨이 사랑하는 시인의 이름부터도 윌리엄-카를로스-윌리엄스, A-B-A′의 운율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패터슨은 버스 운전석에 앉아서도 뒷좌석에 앉은 꼬마 승객들의 잡담에서 운율을 발견한다. 시점숏은 이때에도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응시를, 우리의 응시로 체험하도록 배려한다. 마지막으로는 영화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날마다 반복되는 그의 삶에서도 운율을 찾을 수 있다. 엄밀히는 한 평론가의 말처럼 그의 삶은 반복이 아닌 ‘변주’라 함이 적절하다. 시인이 추구하는 창조적인 시각은 운율을 형성하고, 운율에 따라 삶의 요소들이 시적 대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패터슨은 항상 노트를 들고 다닌다. 그의 시적 영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운율에 관해서는 시에서 오브제들을 배열할 적에, 무엇보다 패터슨 스스로가 민감함을 보인다. 시상이 떠오르지만 운율을 찾지 못해 굳은 얼굴로 고심하기도 하고, 남편의 시를 극구 칭찬하는 아내 앞에서도 운율이 맞지 않는다고 부끄러워한다. 이후 그는 일터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한 소녀를 만나는데, 그 소녀가 지은 자연스러운 각운을 가진 창작시에 마음이 사로잡힌다.


Water falls

From the bright air

It falls like hair


(번역보다도 운율을 감상해보자)

엄마의 일터에서 소녀가 엄마를 기다리며 지은 시를 우연히 감상하게 되는 패터슨

내재율을 내세우며 자유시와 산문시가 널린 현대에서, 운율을 고집하는 태도는 언뜻 시대착오로 보이기도 한다. 오히려 운율을 사용함으로 시인이 하고픈 말과 그리고픈 대상이 원하는 대로 표현되지 않는 게 아닌가? 오래전 시인들 중에서는 억지로 압운과 조사법을 맞추기 위해 의미 없는 말을 끼워 맞추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시의 내용이 종종 훼손되기도 했다. 이것이 동서양 근대에서 자유시 및 산문시가 등장한 배경이다.


하지만 짐 자무쉬의 시론(詩論)은 흔히 생각하는 근대 시론에서 꽤 비켜나 있다. 그가 영화에서 주장하는 운율은 시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특별한 시의성을 띤다. 현대 예술의 문제점은 철학이나 역사, 사회과학 분야로부터 여러 조류를 흡수하려다 자기 자신을 잃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문학에서도 언어는 예술로서의 창조적 기능을 잃고 대상에 대한 인식적 기능만이 부각되어 왔다. 이에 대해 시인 윌리엄스는 ‘새로운 운율이 새로운 사상’이라는 모토를 내세우며, 예술작품에 외부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움직임들을 비판한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1883~1963), 일상적인 것을 적되 새로운 감각을 이끌어내는 시를 주장했다. (출처: poeticuous.com)


운율은 리듬에서 파생된, 리듬의 언어적 모방이다. 우리는 신체적 현상이나 그밖에 모든 자연 현상에서 나타나는 일정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을 리듬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심장 박동에서 천체 운행에까지, 리듬은 세계 안의 모든 자연물이 움직이는 원동력에 대한 통칭이다. 이 원동력의 창조자는 따로 있지만, 우리는 이 힘을 모방하여 언어에 임의로 질서를 정하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이 질서에 따라 언어를 이어나갈 수 있다. 그 질서가 바로 운율이다. 운율은 주위 사물과 사람들, 생활에서의 체험을 시적 오브제로 새로이 발견케 한다. 그리고 시인은 관찰한 오브제들을 운율에 맞춰 배열하여 시라는 세계를 구축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인간이 표현하는 언어의 본질을 신의 창조활동이라 말했다. 성경에 따르면 자연은 신의 명명에 의해 창조됐으며, 아담은 신으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아 이름 없는 사물들을 인간의 언어로 명명했다. 즉 사물에 내재된 본질적 아름다움을 찾아내어 사물의 의미를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창조작업은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사물과 인간 사이 괴리로 사람들에게서 점점 망각되어갔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겐 이미 주어진 사물의 이름을 부르며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만이 남게 되었다.

주인공 패터슨의 출퇴근길이나 버스를 운전하는 동안 창밖에 보이는 풍경들은 패터슨의 시각에서 매일 조금씩 '변주'된다.

패터슨이 지은 시를 통해 새로이 창조된 주요 오브제들은 본래 성냥갑, 맥주, 집 등의 인공물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들의 이름도 도구적 기능이나 자의적 기호만을 나타내어 정해진 틀에 따라서만 인식될 뿐이다. 하지만 시인이 스스로 고른 운율에 따라 이들을 시적 오브제로 삼을 때, 시인은 시어 간 호흡과 행간을 살피며 이들에게 숨겨졌던 면모를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가리키는 이름은 새로운 그들 모습의 상징이 된다. 일상과는 다른, 운율로 짜인 세계 속에서 자신 안에 숨겨진 언어를 찾은 사물들은 운율에 빚을 지고 있다.


시 세계의 근본 질서이자 원동력인 운율을 배제한 삶에서라면 주인공 패터슨은 날마다 사물을 인식할 뿐 시적으로 재창조해내지 못할 것이다. 운율을 통해 나타나는 것은 일상의 반복(recurrence)이 소멸된 시 세계뿐만 아니라 운율의 창조자인 패터슨, 즉 자유로운 자기존재의 공식을 스스로 정의하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소도시 버스 기사로서의 그에게 고상한 사상이나 세계관을 묻는다면, 그는 금요일 갑작스럽게 고장 난 버스 앞에서처럼 식은땀을 흘릴 수도 있겠다.

(3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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