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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Aug 14. 2020

詩, 세계를 짓는 또 하나의 방법-1

영화 <패터슨> 평론

패터슨(2016), 짐 자무쉬 감독 (출처: allocine.fr)


1. 일상적 층차(層差)를 재편하는 시 짓기  

   

시계, 시리얼, 현관문, 평범한 아침 풍경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매일 손목시계를 보고 침대에서 일어나 시리얼에 우유를 붓는, 식사 후 버스 기사 유니폼을 입고 현관문을 나서는 주인공, <패터슨>의 첫 장면은 오늘날 어느 나라 서민들이나 다 비슷하게 겪는 아침 일상일 것이다. 그런데 일상적인 아침이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할 때,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클리셰가 된 지 오래다. 침상에서 뒤척이며 아내의 어깨에 입을 맞출 정도로 평화로운 아침이, 이후 어느 불가항적인 사건에 의해 엉망이 될 거라고, 그래서 더 이상 그와 같은 아침을 맞이할 수 없게 될 거라고 감상자들은 언제부턴가 예상하게 된 것이다. 1975년 개봉작 <택시드라이버>에서 그로부터 22년 후 개봉한 <트루먼쇼>에서 이르기까지, 이제 대다수의 영화에서 일상적인 아침 풍경을 보며 그리 즐겁지 않은 기대를 할 수 있다.


기대에 의해 잃어버린 즐거움을 되찾고자, 짐 자무쉬 감독은 특유의 무심한 듯한 연출로 일상에 접근한다. 관객들의 기대에 개의치 않는 졸린 눈의 버스기사 패터슨은 아침식사를 하던 중 식탁 위 성냥갑을 집어 든다. 성냥갑, 종이로 덮인, 안의 성냥을 다 쓰면 언제라도 버려질 수 있는 물건, 패터슨의 눈은 이토록 사소한 물건에 집중한다. 문구와 그림을 살펴본 그는 시를 한 편 짓는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성냥이 있다..."

성냥갑의 존재가 어떤 사건의 복선이 될 수도, 단독 주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성냥갑은 노곤한 아침에 시상(詩想)을 선물하고는 출근하는 주인공과 함께 퇴장한다. ‘오하이오 블루 팁’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상에 더 크게 소리치려는’ 확성기가 그려진 성냥갑에 대한 그의 시가 남을 뿐이다. 그의 시는 일터에서와 한적한 공원, 저녁 바(Bar)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패터슨의 일상적인 하루는 어김없이 계속된다.

영화는 하루하루마다 패터슨의 시선을 따라 아내 로라, 동료 도니, 버스 승객들, 밤 카페의 손님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패터슨의 시선은 곧 그의 시이고, 그들은 시의 소재이다. 우리는 패터슨의 시를 따라 프레임화 된 그의 생활을 감상한다.


실로 관객들은 그의 눈에 비친 주변인물이나 사물들을 시점 숏을 통해 끊임없이 관찰하도록 요청받는데, 이들 시적 오브제들은 각각 프레임의 주제로 기능한다. 동시에 화면 한편에 나타나는 시구(詩句)들, 패터슨의 손글씨로 적혀가는 구절들을 보며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사물이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이라도 그의 시상을 촉발하는 시적 오브제가 되어 서로 평등함을 지닌다는 것, 또 하나는 그가 사물을 관찰하는 도중 시상을 촉발하는 즉시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 사실로 말미암아 패터슨의 시점 숏을 좇던 관객은 이들 오브제가 가진 암묵적인 중요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시 짓기 과정에 동참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한낱 장치에 불과하던 아침 풍경은 그의 시를 통해 하루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며, 성냥갑은 시인의 예리한 관찰력을 통하여 ‘복선’으로서의 객체가 아닌 영화 서사를 진행시키는 주체로 거듭난다. 이처럼 <패터슨>은 영화 속에서 내적 통일성을 가진 ‘시’라는 또 하나의 서사로 기존 영화가 가졌던 클리셰를 걷어낸다.

패터슨은 하루 일과가 끝나면 어김없이 애완견 마빈을 데리고 동네 바로 향한다.

우리가 한층 더 짚어봐야 할 것은 패터슨의 역할이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버스기사이자 로라의 남편, 애완견 마빈의 주인 역할을 감당한다. 버스를 타고 정해진 노선을 돌며 승객들을 운송하는 패터슨, 집에 와서는 기타를 사 달라고 조르는 아내 앞에서 당황하는 남편이 되고, 마빈이 쓰러뜨리는 집 앞 우편함을 매일 일으켜 세우는 주인이 된다. 커다란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갇힌 듯하다. 물론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여 주변 인물들의 인정을 받고 있지만, 인정 어린 말들과 시선들을 걷어내면 그는 종속자로 남을 뿐이다. 버스 회사에, 가정에, 심지어 애완견의 산책 같은 일과에도 그는 종속되어 있다. ‘패터슨’이라는 이름이 그의 처지를 단정적으로 표현한다. 사람들마다 그의 이름을 듣고 패터슨 태생인지를 물어보며, 버스 앞부분 전광판에는 회사 이름 ‘패터슨’이, 적어도 그가 패터슨 시에 살 동안엔 운전을 그만두지 않을 것처럼 붉고 선명하게 적혀 있다.  

패터슨에게 생활의 즐거움은 두 가지이다:  시를 짓는 것, 시를 읊는 것. 아내 로라의 드레스만큼이나 그의 시는 운율감이 있다.

이러한 처지에서 그는 스스로 또 다른 의무를 부여한다. 바로 ‘시인 패터슨’이라는 역할이다. 아침 부엌에서 저녁 카페에 이르기까지 패터슨의 눈은 세밀한 시선으로 일상적인 사물들을 관찰한다. 동시에 그의 상상력을 통해 그것들을 시로 옮기는 작업이 이어진다. 영화에서 소개되는 시인 윌리엄스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상상력을 ‘지상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세계를 새로이 만드는 능력’이라 정의하면서, 제재를 보는 시각이 새로워야 함을 힘주어 말했다. 윌리엄스를 존경하는 만큼, 패터슨은 주위 사물에 새로운 시각으로 자신의 상상력을 투영시킨다. 그리고 이 행위를 통해 그는 종속자로서가 아닌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확인한다. 그는 시에서 주위 사물들에 친히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성냥갑의 조그만 확성기가 성냥의 아름다움을 자랑케 되고


Here is the most beautiful match in the world


성냥은 사랑하는 여자의 담뱃불로 타오르며


To burst into flame
Lighting, perhaps the cigarette of the woman you love
For the first time


새 봄을 맞이한 시인이 안에서 시를 쓰면서도 다리에게 밖으로 달려 나갈 자유를 주는 것이다


My legs run up the stairs
And out the door
My top half here writing


이로써 패터슨에게 일상이라는 고정된 세계 속에서 시라는 또 하나의 유연한 세계가 탄생한다.

(2장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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