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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Jul 20. 2020

[에세이] 공룡 유감

20.07.19

내가 다니는 교회 근처에는 지자체에서 건설한 듯한 놀이터가 하나 있다. ‘어린이 공원’이라는 점잖은 이름만 들어도 작은 것에서 교육 효과를 이끌어내려 애쓰는 부모들의 시선을 한 번씩 을 테지만, 부모와 아이 할 것 없이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당연히 놀이기구 주변의 공룡 모형일 것이다.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놀이기구에 아이가 없는 광경은 많이 봤지만, 공룡 주변에 아이가 없는 광경은 보지 못했다. 공룡 모형이 박물관이나 테마파크에 전시된 것처럼 실제 크기로 지어진 것도 아니고, 애니매트로닉스처럼 괴성을 지르며 로봇 춤을 추는 것도 아니다(아마 그랬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몰려들었을 테지만). 하지만 날씨가 좋으면 엄마 아빠 손을 잡은 아이들이 놀이터로 마실을 나온다. 그리고 놀이터 매트 아래에서 불쑥 솟아 나온 공룡 뼈 모형을 한참 만지기도 하고, 놀이기구 뒤편의 코뿔소처럼 생긴(아마 용각류인가) 공룡 등에 훌쩍 올라타기도 한다. 그 사이 부모들은 그 주위를 뱅뱅 돌며 꼬마들의 사진 각을 잡는다.


나 또한 어려서 공룡을 좋아했다. 아니, 좋아한 정도가 아니다. 부모님을 졸라 몇 백 페이지짜리 도감을 사서는 책에 소개된 공룡 이름들을 다 외우다 못해, ‘어느 공룡과 어느 공룡이 만나면 이런 모습의 새끼 공룡이 나오지 않을까’하고 상상하며 이름까지도 새로 만들어 붙여주곤 했다. 유치원에서도 공룡 이야기는, 술자리에 단골 안주로 등장하는 연애 이야기 만큼이나 친구들(특히 남자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명절 때 정치 이야기 만큼이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었다. 누가 더 많은 공룡을 알고 있느냐, 티라노사우루스와 메갈로사우루스가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 교실 한구석에 붙어 있는 이름 모를 공룡이 과연 무슨 공룡일까, 그런 종류의 단순함뿐이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친구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기도, 낯선 아이를 단번에 친구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내가 초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예닐곱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공룡 이야기는 어느 지역 아동들에게나 먹히는 대화 소재였다. 아빠가 집에 가자고 아무리 타일러도 놀이터 공룡 모형을 붙잡고 있는 어린 친구를 보면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공룡 좋아하는 마음은 매일반이다.


망포어린이공원, 출처: https://www.samsungdigitalcity.com/1612

아이가 공룡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시기는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피아노 학원에, 태권도 학원에, 속셈학원-나는 다녔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잘 없어졌다고 생각한다-에, 초4 정도가 되면 영재반이니 우수반이니 하는, 학교에서도 없었던 특별학급을 학원에서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다 초6이 되면 방정식을 미리 배우지 않으면 중학교에서 뒤처진다는 얘기를 듣고, ‘이항’이라는 게 왜 일어나는지 설명도 못하는 상태로 연습문제를 죽어라고 푼다. 물론 모든 초등학생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내 경험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학업에 대한 압박뿐 아니라 사실 놀 거리도 많아져서 PC방이라는 곳을 가서 부모님 몰래 ‘캐시충전’을 해 보기도 하고, 공포 이야기 등에 더 끌려서 친구들끼리 무슨 귀신 대처법 같은 것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공룡을 계속 좋아하는 사람은 ‘공룡 덕후’가 되는 것이고(덕후 비하가 아니다. 나도 ‘클래식음악’ 덕후이다), 대부분 공룡에 싫증이 나게 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공룡이 어린 시절 내게 주었던, 혹은 줄 수 있었던 교육 효과를 소홀히 보며 살았던 것이다. 물론 어린 시절이야 그런 거창한 것에 상관없이 마냥 공룡을 좋아했을 뿐이다. 지금 돌아보니, ‘고고다이노’와 같은 공룡 관련 콘텐츠가 최근에도 계속 생산되는 상황에서, 공룡이라는 동물만이 가진 특징이 아이들의 교육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교육 효과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추측에 머무를 뿐이다. 하지만 대개 다음의 세 가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공룡은 아이들에게 현재 존재하지 않는 옛날의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동물원에 가면 볼 수 있는 호랑이, 코끼리, 돌고래와 같은 동물들은 지금도 우리 시대에 살아 있다. 코로나가 극성인 이 시기에도 유튜브 같은 매체를 통해서 호랑이의 하품, 거대한 코끼리 똥, 수족관에서 아이를 갑자기 놀래키는 돌고래의 짓궂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디서 공룡이 사육사가 던져주는 날고기와 건초더미를 받아먹으며 사는 것을 보았는가? 공룡에 대한 많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다큐멘터리가 나왔지만 이들 사이에서 보이는 공룡의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고증을 통해 복원된 모습일 뿐이지 실제 그것들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매체를 통해 공룡을 접할 때는 그것들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듯 느끼겠지만, 이내 사람이 태어나기도 더 전에 멸종된 동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종시에 이런 학습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이 현시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닌, 헤아리기 힘든 여러 시대를 거쳐 왔음을 알게 될 것이고, 인간은 그 긴 시간 속에서 오로지 잠깐 동안을 살고 있는 존재임을 깨달을 것이다.


둘째로, 아이들은 공룡 이미지를 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공룡 지식과 비교하고 설명하며 관찰력과 논리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공룡에 대한 여러 고증이 있고 그에 따라 여러 이미지들이 생산되었다. 가령 아이들은 알로사우루스의 이미지를 보면서 ‘내가 알고 있던 알로사우루스는 꼬리가 매끈한 데 왜 여기서는 꼬리가 깃털처럼 생겼을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이 의문점을 계기로 아이들은 더 많은 자료를 찾으며 깃털이 없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와 있다고 주장하는 측의 근거를 비교하며 어느 주장이 더 논리력과 설득력이 있는 지를 구분할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공룡과 어느 공룡이 싸우면 누가 이기나’를 두고 불붙었던 논쟁도 지금 상기해보면 유익했던 논쟁이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국룰’이 아이들에게나 어른들에게나 있긴 하지만 공룡에 대해서만큼은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더 많은 공룡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상대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도 ‘공룡 논쟁’ 동안에는 박물관, 영화, 애니메이션에서 봤던 모든 지식을 총동원해야 했고, 만약 내가 굴복했다 해도 그날로 집에 돌아가 인터넷과 책을 뒤져가며 더 많은 공부를 하곤 했다.


셋째로, 찰흙이나 블록 등으로 공룡 모형을 만들며 아이들은 공룡에 대한 상상을 구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찰흙을 주무르고 블록을 꿰어 맞추며 만든 작품이 사실 얼마나 근사하겠는가. 어려서부터 소질이 남달라 만드는 즉시 현관 옆 진열장 한 단을 차지하는 영재도 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틀림없이 찰흙 공룡에 대해 이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목이 긴 공룡을 만들려다 무게중심 개념이 없어 공룡이 무고하게 참수된다; 또는 스테고사우루스 같은 종류를 만들려다 다음날 등 위의 돛 몇 개가 떨어져 아예 나머지 돛도 다 떼고 원래 돛 없는 공룡으로 만들었던 척한다. 하지만 공룡이라는 동물이 원래 상상으로만 남게 된 동물인지라 누구나 공룡 모형을 만들 때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미지에 더해 얼마간 상상을 가미할 수밖에 없다. 등에 달린 돛의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색은 어떤 색을 입힐 것인지, 레고로 만들 경우 티라노사우루스의 팔을 몸통 바로 앞 중간 지점에 붙일 것인지, 아니면 몸통 중간에 가로로 기다란 블록을 관통시켜 그 양 끝에 팔을 붙일 것인지. 아니면 내 어릴 적 상상대로 새로운 공룡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무심코 지나치던 공룡 모형을 웬일인지 마음이 끌려 유심히 봤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생각이 떠오를 줄 몰랐다. 이제는 기억하는 공룡의 이름이 손에 꼽힐 뿐이고 공룡이 대화 주제로 다뤄지는 일은 더욱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놀이터 공룡 모형 앞에 잠시 멈춰 어릴 적 공룡에 대한 추억을 되새겨보는 이유는, 공룡을 통해 어쩌면 학교나 학원에서도 직접 가르쳐주지 않았던 많은 것을 나도 모르게 배웠고, 그 배움을 지금 그리워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놀이터는 없어져도, 저 공룡들 만큼은 계속 남아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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