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된 지 20년도 더 지났건만 저자가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관점은 현시대에도 어느 정도 유효하다.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때가 2011년 고등학교 국어담당이었던 최문용 선생님의 추천(같은 반강제)으로, 당시 학교 학생들에게 필독도서가 된 책이 <문명의 충돌>이다. 소설집만 넘겨보던 고등학생 때를 지나니 그분이 이 책을 추천하며 하신 말씀도 까맣게 잊혀 갔다.
다시 이 책을 꺼내 읽게 된 때가 불과 일 년 전이다. 책을 읽다 보니 '세기말'에 쓰인 책인지라 헌팅턴이 당시의 국제정세에 대해 묘사하고 예측한 점이 현재와도 들어맞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책 내용과 최근의 국제 기사를 대조하며 문답을 만들어 보았다.
세계를 <문명의 충돌>에서 제시한 문화권에 따라 나눈 지도
(1996년의 질문과 20년 후의 대답들)
Q1. 중국은 미사일과 미사일 관련 기술을 이란에 제공한 주요국이었다.(p.252) 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중에 중공은 이란이 보유한 무기의 22%를 제공했고, 1990년 1월 과학기술 협력과 군사기술 이전 분야에서 10년 기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1993년에는 사정거리 600마일의 노동 1호 미사일을 이란에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중국-이란 관계는 현재 어떠한가?
이란-이라크 전쟁의 표면적인 원인은 접경지역 수로의 소유권 분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슬람 내 시아파와 수니파의 대립이 있었다. (history.khan.kr)
A. 2018년 6월 28일 자 일본경제 아시안 리뷰에 따르면 중국은 이란산 석유를 사지 말라는 미국의 요구에 아랑곳 않고, 동월 27일 정례 브리핑에서 석유를 포함한 무역 분야에서 이란과 정상적인 교류와 협력 관계를 이어갈 것으로 루캉(陆慷) 대변인을 통해 밝혔다. 아울러 상하이 협력기구(SCO),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 회의(CICA) 등 다자차원의 협력도 강화되는 추세다.(주 이란 한국대사관 - 이란 개관, 15.12.03)
Q2. 1990년대 중반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교도 인구는 400만 명에 이른다.(p.266) 극우 국민전선에 대한 지지표는 1988년 9.6%였고 95년 대통령 후보로 나선 민족주의 성향의 두 인물이 얻은 표는 도합 19.9%였다. 또한 자크 시락 전 대통령은 1990년, 이민의 완전 봉쇄를 주장했고, 샤를 파스쿠아 내무장관은 '제로'이민 정책을 내걸었다. 현재 프랑스 정부의 대 이슬람 정책은 어떠한가?
스트라스부르 총격 테러 범인을 색출 중인 프랑스 사법 당국
A. 2018년 2월 23일 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에두아르 C. 필리프 총리는 "이슬람 급진화는 우리 사회의 큰 위협이며, 국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싸움"이라며 새 대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급진화 수감자들을 격리하기 위해 1500 개의 수감공간을 신설하는 것이다. 또 에마뉴엘 마크롱 정부는 급진주의를 확산할 소지가 있는 종교 지향적 학교에 대한 감시도 확대하기로 했다. 거듭되는 IS 테러와 스트라스부르 총격 테러(18.12.11 발생)의 영향으로 반이슬람 정책 및 기조는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Q3. 90년대 중반, 인도는 항공모함, 극저온 로켓 기술을 포함하여 중요한 무기를 러시아로부터 모두 도입했고, 이는 미국의 제재를 낳았다.(p.330) 인도와 미국 사이에는 인권, 카슈미르 분쟁, 경제 자유와 같은 현안들이 걸려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미국과 파키스탄의 관계는 냉각되고 중국을 견제한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인도와 미국이 접근할 가능성이 높다고 헌팅턴은 밝히고 있다. 현재 인도와 미국의 관계는 어떠한가?
인도 수상 나렌드라 모디, 미국 대통령 트럼프, 그리고 식은 밥 같은 포옹 (nationalinterests.com)
A. 2018년 9월 2일 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트럼프 정부가 2017년 새로운 아시아 전략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을 내세웠지만, 정작 핵심국가인 인도와 미국의 관계는 삐걱대고 있다. 첫째로는 트럼프 개인의 외교적 결례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미국과 이란-러시아의 관계 악화 때문이다. 인도는 미국의 이란 산 원유 수입 중단 요구를 묵살하며 러시아 미사일 방어 시스템 수입에 앞서 미국의 제재 위협에 직면했다. 미국과 인도는 18년 9월 7일 첫 외교 국방장관 회의를 통해 군사협력 수준을, 중국에 대항하여, 동맹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렸으나 같은 해 12월 러시아와도 국방장관 회의를 열어 미국에 견제의 태도를 취했다.
예전보다 국제정치로부터 관심이 멀어졌지만, 대체로 국가들 사이에서 순수한 이해관계보다 종교와 문화권에 따라 협력과 배척이 이루어지는 추세는 21세기 들어 더 강해진 듯하다. 냉전시대를 지나 다극체제에 접어든 지도 3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아직도 지구 상의 국가들은 몇몇 학자들이 모델로 제시한 유연한 대외관계, 철저히 실리에 따라 적과 우방을 넘나드는 국제정치를 유지하지는 않고 있다. 그 까닭이 바로 문명의 차이가 아닐까. 서구가 민주주의 및 인권신장을 먼저 쟁취했다고 하여 후발주자인 동양권이 그들의 개인주의를 답습해야 할 필연성이 없듯 말이다.
그런데 코로나가 발발하기 직전부터 민족주의는 종교권 및 문화권 단위에서 개개의 국가 단위로 축소되는 방향으로 강해짐을 보이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과 홍콩 또는 대만과의 분쟁 및 관계 냉각, 일본 헌법 개정을 촉구하던 아베 총리의(엊그제 사임을 발표하긴 했지만) 국수주의, 그러한 일본과 역사문제로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 한국의 민족주의는, 어쩌면 코로나 위기 속에 서로 간의 고립을 가속화할 듯하다.
단, 저자가 미국인이며 코카시안(즉 미국 정부가 1965년 이전 국가별 이민 할당법을 위해 정의한 '백인 집단'에 해당되는 사람)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점이 부분적으로 눈에 띈다.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히스패닉이나 아시아 혈통이 아메리카 대륙에 많이 존재함에도 이들을 '위협 대상'으로 인식하는 그의 시각은 아직도 백인 우월주의나 미국 국수주의(American Nationalism)에 묶여 있는 게 아닐까? 문명의 '착종' 양상이 이 책에 언급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하지만 <문명의 충돌>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이 주제 대해서는 많은 책이 이미 출판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