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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Sep 07. 2020

[독서노트] 미시마유키오 vs 동경대전공투

1969-2000 (미시마유키오, 기무라오사무 등 지음, 김항 옮김)

노래미 한 마리를 낚으려 이곳저곳에 낚싯줄을 던지다 보니 해안가의 지도와 어군의 분포도까지도 그릴 수 있게 된 셈이다.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 이름 하나만 보고 덜컥 구입한 책에서 일본인의 근대 정체성이며 근대사며 일본어라는 언어적 구조에 대해 갖는 콤플렉스까지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가령 외래어 표기 시 가타가나를 사용하는 일이 일본을 세계에서 더 고립시킨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말이라던지).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이 되던 무렵, 어느 시점에서 나는 미시마 유키오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미시마유키오의 극단적인 우익 사상을 아직 잘 모를 때였다. 우연한 기회에 소설 <금각사>를 읽고,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사원에 불을 질러 사원을 물질성을 초월한 '정신'으로만 남기려는 소년의 의지에 흥미를 가졌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랑하면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으므로. 이어서 <파도소리>, <가면의 고백>, <사랑의 갈증>을 읽다 보니 이 작가가 쓴 작품에는 다양한 주제가 있다기보다 일정한 사상이 있고, 그 아래에 다양하게 변주되는 주제가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특히 <가면의 고백>에서 패전 후 도덕과 질서로 상처 받은 인간성을 가리기 급급했던 기성세대를 가면으로 치부하며 反-도덕, 反-질서를 띤 민낯을 기꺼이 내비쳤던 주인공(혹은 미시마)을 접하니 그가 더욱 궁금해졌다. 마침 모 일간지 서평 코너에 이 책이 소개됐고, 나는 망설임 없이 인터넷으로 이 책을 구매했다.


할복 자살 직전의 미시마 유키오. 민병까지 조직해 천황을 다시 국격으로 끌어올리려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손에 넣은 책을 펼쳐 몇 장을 읽고는 단박에 느꼈다. 보통이 아니다. 1부에서는 미시마와 전공투(전학공투회의) 대원들 사이의 토론이 소개된다. 1969년 도쿄대 야스다(安田) 강당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호스트는 미시마였

으나 주인공은 전공투 학생들이었다. 미시마유키오만 생각하고 책장을 넘기다 보니 토론장에서 빠르게 휙휙 오갔을 관념적 어휘들과 일고여덟 명의 전공투 학생들이 떼를 지어 미시마의 논리를 반박하-거나 딴지를 거-는 외침이 텍스트를 어떻게든 통합적으로 이해하려 했던 내 노력을 끝내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했다. 당시 이 책과의 씨름 끝에 내가 건진 것이라고는 미시마의 천황주의(상징적 내셔널리즘으로서 천황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 해방구=바리케이드(역사적으로 자신들을 기성세대와 단절시키는 바리케이드)라는 전공투의 슬로건, 그런 '이름' 뿐이었다.


그리고 6년이 지나 이 책을 완독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6년 전에 꽂아놓은 책갈피는 읽지 못한 1/3만큼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마저도 읽을 마음이 선뜻 생기지는 않았다. 다시 현란한 사상과 논리에 질식하여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마음을 다져먹고 재차 읽어나가면서도 모든 문장이 쉽게 읽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책 속 인물들이 주장하는 요점을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동안 느꼈던 어려움은 미시마유키오를 주인공으로 놓은 데에 있었다: 책 제목을 응당 <동경대전공투 대 미시마유키오>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다.


(좌) 도쿄대 투쟁 당시 전공투에 점거당한 야스다 강당 (우) 현재의 야스다 강당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는 아마 그간에 축적되어 온 68운동에 대한 파편적인 지식이 많은 도움을 준 것 같다. 소위 금지에 대한 금지(prohibition against prohibition)라고 하듯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에서 일어난 68운동은 기성세대의 권력에 대항하고 그들이 금지한 모든 금기를 해방시키는 동시대적 움직임이었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사회 전반에 걸쳐 행정적 변혁을 이끌어 내는 성공을 거뒀다. (대만에서 방영했던 TV 프로그램 <신문대해독>에서 한 프랑스인 게스트가 1965년 이전에는 여성이 자신 이름으로 은행 계좌도 하나 열 수 없었음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에 반해 일본은 왜 성공하지 못하고 현재까지도 전공투에 관해서라면 부정적 인식만 남았는가.


그 질문은 미시마가 지적한 대로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시간을 부정하고(단절시키고) 현재에 '무목적의 시간'을 주장하며 해방구로서의 공간을 만드는 데만 골몰한 까닭으로 답할 수 있을 듯하다. 실제로 패전 이후 일본에서는 천황이 인간임을 선언하고, 전쟁 때 군국주의 및 전체주의에 봉사했던 지식인과 정치인들은 일본인이 더 이상 신민(신하로서의 백성)이 아니며 민주국가의 국민으로 거듭났음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전쟁때와 같이 정치적 사회적 주도권을 쥐게 된다. 단적으로 아베 전 총리의 외숙부이자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 또한 3년간 총리직을 맡았던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당시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가 보인 예의 태도에서 과거의 청산이 없이 이어지는 권력의 당위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것이다. 68년 일어난 니혼대학 22억 엔 횡령 사건도쿄의대 인턴제 폐지는 의구심을 행동으로 증폭시켰고, 학생들로부터 괴리되어 권력집단화된 '대학의 해체'와 천황제 아래 연속적인 역사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자기부정(self negation)을 보였다. 애석하게도 명확한 행동강령과 통일된 목표의 부재는 70년대 초 전공투가 단순한 폭력집단으로 전락하고 와해되는 상황을 초래한다.

야마토다케루의 동상. 문헌에 따르면 형 오우스노미코토가 천황의 왕비를 빼앗자 의분에 차서 형을 직접 죽인다.


토론장에서 미시마가 역설한 천황주의 역시 당시 정세에서 느끼는 염증에서 비롯되었다. 이 점에서 전공투 운동과 유사해 보이기도 하지만, 둘 사이에는 표면적으로 두 가지  차이가 있다: 표면적으로는 천황을 종교와 같은 '상징적 권력'으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천황의 존재를 부정할 것인가. 그 이면에는 과거 역사로부터 연속될 것인가, 아니면 단절될 것인가. 미시마가 제시한 천황 모델의 기원은 야마토다케루 왕자의 카리스마인 한편, 전공투가 추구한 해방구는 행동 자체를 목적으로 여러 가능태를 흡수하는, 역사성이 배제된 순수공간을 상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시마와 전공투는 서로를 적으로 속단하지 않고 가치가 일체 배제된, 데리다(Derrida)적 의미의 '타자'로서 인식하고 접근을 시도한다. 그 와중에도 대화의 방법으로서 폭력을 긍정하는 태도는 사뭇 흥미롭다.


30년이 지난 후 다시 만난 옛 전공투 '동지'들은 당시의 운동을 전 세계적 68운동과 궤를 같이 한 현상으로 보았다. 종전 뒤엔 항상 책임이 따르는 법이고, 그 책임을 묻는 재판에서 신세대가 기소자 역할을 하는 건 당연하다. 기성세대가 된 그들은 더욱 첨예한 논리와 풍부한 지식으로 당시를 분석했지만, 전공투 당시 '동지'들 개개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서로 달랐다. 고사카 슈헤이가 말한 대로 '공간'의 의미 조차 시간성이 없다면 무한히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2부의 토론에서는 오히려 1부에서의 토론 주제를 더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수채화에 공들여 붓질을 더했더니 되려 그림의 윤곽이 뭉개지는 듯한, 그런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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