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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Jul 13. 2020

[독서노트] 위대한 개츠비

(Francis S. Fitzgerald, 송무 옮김, 문예출판사)

16.11 중순 완독


1. 야경과 사람들


서울 시내 한복판을 걷노라면 하늘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 63 빌딩을 보러 가족들과 함께 찾아갔던 서울의 모습은 확실히 경이로웠지만, 재수생활을 하기 위해 상경하고 다시 본 서울은 서울에 대한 이전의 내 기억을 거진 무력화시키고도 남았다. 특히 야경이 그랬다.

밤이면 가로등 불, 몇몇 배달음식점의 간판, 대충 갉아먹고 남은 옥수수 알갱이마냥 드문드문 켜진 아파트 창문의 불빛들이 내가 보아 온 반딧불이에 불과했다. 그런 내게 서울 야경은 갑자기 얼굴을 비추는 헤드라이트와도 같았다. 그와 동시에 막연한 기대감이 든다. 이곳에서 언젠가는 저 많은 불빛들을 다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래, 여기까지만 했어도 좋으련만, 많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착각을 품는다, 저 많은 불빛들을 다 소유했다고. 나도 그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닉 캐러웨이의 긴 자기소개가 끝나고 펼쳐지는 장면은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이다. 하지만 뷰캐넌의 저택에 모인 군상(群像)은 자연의 풍광이나 어떤 고상한 가치를 찬미하고 있지는 않다. 아니, 그런 내용이 인물들의 대화중에 들어있을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주제로서가 아닌 첨부된 상태로 말이다. 뷰캐넌 저택에서의 대화에서 모든 주제는 첨부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는 캐서린(윌슨 부인의 동생)의 아파트에서도, 개츠비 저택의 유흥에서도 계속된다.

첨부된 주제들은 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이 상대방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의식주에 대한 품평,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지인에 대한 가십, 자신의 경험에 대한 과장 섞인 소개, 일련의 주제들을 견인하는 주체는 항상 ‘I(我)’이다. 상대방 또는 제3의 인물에 대해 나 자신이 판단하고, 관련 상황을 구미에 맞게 각색하며, 나 자신의 우월함을 강조하는 인물들이 화자인 캐러웨이의 눈에 포착된다. 인물들은 먼저 주체(主體)를 소유하였고, 많은 주제(主題)를 소유한 다음, 끝으로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을 소유함으로써 ‘I’의 대화를 완성하려는 야망을 갖는 것이다. 이 야망들은 충족되지 못할 운명을 띠고 태어나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유랑한다.


“난 이곳이 마음에 드네… 이 집은 본래 석유 사업가 드메인 씨 집이었네.”


 “글세, 그 사람 빌헬름 황제의 조카인가 사촌인가 된다고 하더군요. 그 사람 돈이 다 거기서 나온다고.”

“그건 그렇고 당신에게 내 인생 얘기를 좀 하죠.”     



이런 말들은 각각 톰 뷰캐넌, 머틀 윌슨의 동생, 개츠비가 캐러웨이에게 건넨 말이다. 각각의 말들에는 캐러웨이로부터 받고 싶어 하는 선망과 공감이 짙게 배어 있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마음을 얻으면 그를 완전히 소유한 마냥 착각을 하곤 하는데, 캐러웨이를 앞에 둔 이들 세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때로는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유언비어나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캐서린은 자신이 피상적으로만 아는 개츠비의 집안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얘기하며, 개츠비는 책의 말미에 밝혀질 부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고아라고 소개한다. 이러한 노력에도 ‘I’의 대화는 완성되지 못하고, 이들의 욕망은 좌절된다. 마치 야경을 소유하려는 욕망처럼 말이다.

멀리서 야경을 바라볼 때는 많은 불빛들이 모두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지만 그들을 소유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을 때, 네온사인이며 가로등이며 온갖 불빛들은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음을 알게 된다. 혹은 그 빛이라는 것이 한낱 만져지는 고체덩어리, 신비하지도 않은 간판과 쇼윈도 전등이었음을 알고야 만다. 결코 그것들은 ‘나’를 향해서만 빛을 내지 않는다. 단지 그 주위에는 서로 똑같은 착각을 품은 채 이끌려 온 군상만이 있을 뿐이다.

야경들과 그것을 쫓는 사람들 간의 이뤄질 수 없는 수많은 랑데부를, 소설은 개츠비와 데이지의 만남으로 응축시킨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열정은 데이지의 친구 조던의 입으로 드러난다.     

(출처: 영화 <위대한 개츠비>, 1974)


“개츠비가 그 집을 산 것은, 데이지가 만(灣) 바로 건너편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어요.”
 

이때부터 캐러웨이는 개츠비와 데이지 사이의 가교 역할을 본의 아니게 맡게 되는데,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과 만난 직후의 행동에 대해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 데이지를 생각하며 밀주업도 서슴지 않고 닥치는 대로 돈을 모으는 개츠비, 신문을 매일같이 읽으며 데이지의 이름을 찾는 개츠비, 데이지와 대면하기에 앞서 안절부절못하는 개츠비를 살펴보자. 그의 모든 행로가 보이지 않는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을 땐 그는 멀리서 보는 야경에 매혹된 행인과도 같았다. 하지만 데이지를 만나고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기억 내지는 환상 속의 여자가 아님을 알았을 때 그는 환멸에 사로잡힌다. 마음속에 품어왔던 재회의 욕망을 이루자 개츠비는 다시 ‘선창가의 초록 불빛’을 그리워하고, 데이지는 그저 그의 옷장에서 꺼낸 셔츠 더미에 파묻혀 그것들을 물질로서 경탄하기만 할 뿐이다.

7장에서 나타나는 톰·데이지·개츠비의 삼자대면에서 개츠비는 어느새 데이지에 대한 열정을 저열한 소유욕으로 바꾼 채 톰과 대치한다. 데이지가 현재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소리치는 장면은 확신이기보다는 차라리 고집이다. 자신이 품었던 초록 불빛의 환상을 지키고픈, 마치 가까이의 간판과 네온사인을 보고도 이전에 멀리서 바라보던 야경의 기억으로 그것들을 애써 덧칠하려는 처절한 절규가 아닐까, 이미 열정 따위는 싸늘히 재가 된 후에.   


2. 열린 공간과 닫힌 공간     


1920년대로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미국 사회는 1차 세계대전 특수(特需)로 말미암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The Jazz Age, The Roaring Age라 불리던 시대는 증권가의 흥왕으로 벼락부자들을 양산했고 자동차 구매량은 20년대 말에 들어 1200만 대를 넘어섰으며, 문화산업에도 많은 돈이 흘러 들어가 수많은 은막 스타들과 가수들이 등장하였다. 스포츠 산업 측면에서도 야구, 권투 등 다양한 종목들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득 메울 정도의 찬란한 황금기를 누렸으며 밤 문화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본다면 개츠비가 살던 20년대 미국 사회는 부와 성공을 찾는 사람들에게 의심 없이 열린 공간이었다. 과연 그랬을까? 그곳에는 그들이 원했던 성공만이 지속됐을까?

애석하게도 지속될 것만 같았던 열린 공간은 여러 성공사례들과 동시에 문제적 인간들을 양산하는 역설적인 창조력을 보여주었다. 지폐장 세는 소리와 공연장 색소폰 소리, 주사위 굴러가는 소리에 도취된 사람들은 정신적 긴장의 끈을 서서히 놓으며 물신주의와 도덕적 해이에 점점 빠져갔다. 그러면서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당장 ‘내 손에’ 쥐고 봐야 하는 습성이 생겼고 이 습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까지 번져갔다. 우리는 피츠제럴드가 소설을 들려주기에 앞서 밝힌 에피그램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이여, 황금 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연인이여, 당신을 가져야겠어요!”     


황금 모자(gold-hat)와 높이 뛰어오름(high-bouncing)은 산업사회의 모든 광택성(光澤性)과 탄력성(彈力性)에 대한 환유법이다. 두 성질은 흙으로 빚어진 인간 육체가 본래 갖지 않은 성질로서 우리를 강렬히 매혹시킨다. 이와 같은 원초적 결핍을 충족하려는 본능에 따라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이와 같은 성질을 발견하고 타인을 소유하려 하나 끝내 절망한다. 어느 누구도 광택성과 탄력성을 다른 물질들로부터 빌릴 수는 있지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으며, 결국 두 성질에 대한 희구는 사회에서의 열린 공간이 아닌 개개인의 환상 속 닫힌 공간에서만 실현될 수밖에 없다.

열린 공간에 대한 논의는 사실상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개츠비가 생(生)의 무대로 삼은 20년대 미국 사회가 전부 열린 공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닫힌 공간으로서의 소설 속 인물들의 심리를 살펴보려 한다.    

 

‘그것(개츠비의 감수성)은 희망을 감지하는 탁월한 재능, 내가 여태껏 어느 누구에게서도 발견하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하지 못할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개츠비는 그 초록 불빛을 믿었다. 한 해 한 해 우리 앞에서 뒤로 물러나는 황홀한 축제 같은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캐러웨이는 소설의 서두와 말미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그리고 성공한 줄 알았으나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 개츠비를 추억한다. 그렇다면 그는 개츠비의 어떤 점에 찬사를 보낸 것일까?

개츠비는 데이지와의 인연을 다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애먼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이 새드 엔딩을 톺아보자. 개츠비가 수단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부를 축적하여 꿈에 그리던 데이지에게 접근한 것, 그 험난한 과정과 꿈에의 접근이 찬사의 최종 도착지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작가는 캐러웨이를 통해 개츠비를 이상화하려는 의도가 없다. 캐러웨이는 개츠비의 걸어온 인생을 동정하지만 거기까지일 뿐이다. 만일 개츠비의 꿈이 실현된다면 동정을 위한 찬사는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 캐러웨이는 궁극적으로 현실의 열린 공간에서 개츠비의 성공 신화를 얻지 못했다. 대신 자기 속의 닫힌 공간에서, 애초에 개츠비에게서 얻으려 했던 아우라를 동정으로 축소시켜 보상심리를 얻는 데에 그치고 만다.

(출처: 영화 <위대한 개츠비>, 1974)

캐러웨이가 오직 닫힌 공간 속에서 개츠비의 명예며 성공신화를 소유하는 데 머물렀다면, 개츠비 역시 그의 닫힌 공간에서 데이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녀를 잠정적 연인으로까지 여기게 된다. 소설의 모든 초점이 모아지는 7장에서의 대화는 바로 열린 공간과 닫힌 공간이 서로 충돌하는 장(場)으로 나타나는데, 피츠제럴드는 사회가 쌓아 올린 견고한 제도와 규범의 기능과, 한 인간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악전고투하며(물론 그 과정이 심도 있게 묘사되진 않았지만) 얻은 부와 성공의 기능을 시험한다.     


“우리(톰과 데이지)는 만날 수가 없었소, 하지만 형씨, 우린 그동안 내내 사랑했던 거고 당신은 몰랐던 거요.”


“여자 손가락에 끼워준 반지까지 도로 훔쳐가는 소문난 사기꾼에게 가려고 나와 헤어지진 않아.”     


혼인관계와 개츠비의 범죄(밀주업)을 카드로 쥔 톰, 데이지와의 옛 낭만과 물질적 성공을 카드로 쥔 개츠비, 두 사람의 대치는 뷰캐넌 저택을 나설 때까지도 팽팽하다가 윌슨 가게에서의 돌연한 사고로 다른 국면을 맞는다. 개츠비와 데이지가 탄 차에 치여 숨진 윌슨 부인, 그리고 자백을 뒤로하고 도망친 개츠비와 데이지, 이로써 열린 공간의 우세와 닫힌 공간의 열세가 확실해진다. 마지막으로 열린 공간은 윌슨으로 하여금 개츠비를 총탄으로 심판케 함으로 개츠비가 품었던 닫힌 공간을 완전히 굴복시킨다.

개츠비는 죽었지만, 그러나 닫힌 공간 자체는 세상에서 없어질 수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 물결이 지속되는 한 우리들 개개인의 생애 속에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로 열린 공간에서 개츠비와 같이 ‘좀 더 빨리 달리고, 팔을 좀 더 멀리 뻗을’ 수 있게 해 주는 동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안의 닫힌 공간이며, 또한 그것은 열린 공간에서 타인들이 일으키는 거친 물결에 저항하는, 개인적 희망을 남겨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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