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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Nov 09. 2020

[독서노트] 쇼팽 노트

(앙드레 지드 지음, 임희근 옮김, 포노)

독서노트를 4년째 쓰다 보니 책을 평가하는 부분도 달라지는 듯하다. 독서노트를 처음 쓸 때쯤엔 책 내용이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각 장에서 다루는 주제들의 구성이 어떠한 지에 초점을 맞추곤 했다. 즉, 내적인 부분에 많이 치중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책이 현재 이 시기에 이 시기에 갖는 시의성이 어떠한지, 어느 독자층을 겨냥하고 만들어졌는지, 저자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저술한다면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올지, 외적인 부분에 많은 초점을 맞추며 기록하게 된다. 물론 내적인 요소나 외적인 요소 모두 등한시하면 안 된다. 다만 뭔가 이렇게 나의 시각이 변화하는 궤적을 바라보는 것도 틈틈이 독서노트를 쓰는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책은 책장을 넘기면서 부득불 외적인 부분이 자꾸 눈에 밟혀, 감동과는 다른 의미로, 읽기를 중간중간 멈추게 된다. <쇼팽 노트> 또한 그런 책인 듯하다. <전원 교향악>, <위폐범들> 등을 쓴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1931년, 낭만주의 작곡가 쇼팽의 곡을 직접 연주하며 떠오른 인상들을 모아 음악잡지 <르뷔 뮤지칼>에 투고한다. 그 글들을 엮은 책이 <쇼팽 노트>이다. 첫 장에서부터 저자의 '쇼팽 예찬론'이 담겨 있다.


쇼팽 이전의 음악가들(그중 바흐는 제외하고)은 시인처럼 하나의 감정에서 출발한다. 일단 출발해놓고 뒤이어 표현할 단어를 찾는 시인처럼. ... 쇼팽은 완벽한 예술가로서 음표에서 출발한다(쇼팽이 '즉흥적으로 작곡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pp.23~24)


모든 음악에서 이보다 더 포근히 감싸는, 이보다 더 부드러운 몸짓이 있을까? 한 음 한 음으로 하여금 바라게(欲)하고 기다리게 놔두는 빼어난 접근에 의해 먼저 그 음을 꾀어 놓아야만 결정적인 음 하나하나에 이를 수 있다. (쇼팽 전주곡 13번에 대한 감상, p.128)


책의 1부에서는 잡지에 투고했던 쇼팽 관련 원고가, 2부에서는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던 지드가 '쇼팽'을 연주한 기록을 남긴 일기와 곡에 대한 해석이, 3부에서는 지드와 그의 동료 혹은 독자들이 음악에 대해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이 실려 있다. 맨 마지막엔 피아니스트 아니크 모리스와의 대담이 수록됐다. 자, 이쯤에서 물어보자. 이 책은 누구를 위해 쓰인 책인가?


앙드레 지드(1869~1951)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다.

가설 하나, 소설가 지드의 독자를 위해 쓰였다: 지드의 비유법이나 전기(biography), 또는 그밖에 지드에게서만 나타나는 문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쇼팽을 모델로 한 소설로 짐작하고 읽을 것이다. 그러고는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악보들과 arpeggio(분산화음)부터 이름조차 생소한 sfogato(공기처럼 가볍게 연주함)에 이르는 음악 용어들에 압도될 것이다. 아마 "나의 지드는 이렇지 않아!"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을까. 지드가 다른 연주자들의 쇼팽 해석에 대해 무지한 해석이라느니 과시적이라느니 비난하는 대목도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연주에 '관능미'가 없다는 피아니스트 코르토(A. Cortot)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독자는 지드의 비난을 담은 손가락이 향하는 목적지가 아닌, 뭔지 모를 것에 흥분해서 덜덜 떨고 있는 그의 손가락밖에 보지 못할 것이다.


가설 둘, 음악 애호가 독자들을 위해 쓰였다: 여러 음악 지식과 연주 경험으로 무장한 사람이라면 지드가 자기 방식으로 표현하는 음악적 감상을 얼추 이해할 수는 있다. 'F#'의 세계에서 'F내추럴'의 세계로 옮겨가는 신비함이 '녹색의 떨리는 예리함 같은 것을 자연이 잃어버린 듯'하다는 시적 표현에 공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쇼팽 스케르초 2번을 연주회장을 위한 과시용 작품으로만 치부하거나, 쇼팽 곡에 crescendo(점점 세게 연주함)가 없어야 한다는 주장을 할 때 과연 모두가 공감할 것인가? 물론 한낱 개인적 의견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 책은 쇼팽을 위해 지드가 쓴 책이 아닌, 지드를 위해 쇼팽이 쓴(것으로 가장한) 책이 아닐까? 일례로 연주자들은 미묘한 rubato(연주 시 박자에 여유를 주어 기분을 살림)와 적절한 fermata(음의 길이를 늘임)를 글로 습득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렇다.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를 묘사할 때, 모두는 자신이 정확하게 대상을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상이 된 당사자의 눈에는 타인이 묘사한 자신의 모습에 완전히 수긍이 가지는 않는다. 5년마다 열리는 쇼팽 국제 콩쿠르를 봐도 최근 조성진의 해석과 30여 년 전 이보 포고렐리치의 해석이 다르다. 어쩌면 이 책은 정말 지드가 그저 '팬심'으로 써 내려간 '쇼팽의 팬소설'인 것이다. 쇼팽이 살아서 본다면 고마워하면서도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을 조심스레 들먹이자면, 어차피 절대적인 지식이 없어진 사회에서는 어떤 책도 그 내용이 절대 옳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 <쇼팽 노트>라는 책이 쓰인 까닭은 '지드의 눈에 비친 쇼팽'이라는 지식을 보여주는 일만 목적으로 삼는 데 불과한 것인가. 많은 지식 중에 하나, 그 정도로만 책이 지니는 가치를 한정 지을 수 있을까. 혹 이 책을 통해 쇼팽이나 그의 곡을 중심으로 더 넓고 깊게 이해하는 방법은 없었는지. 책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또 피아노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어딘지 허전함이 남는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언급한 쇼팽 전주곡 13번의 동영상 링크를 조성진의 연주로 첨부해 드립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esizTaBT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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