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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Nov 16. 2020

[독서노트] 머리 위를 조심해

(이수진 소설집, 문학동네)


1. 고독을 말하지 않는 고독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1961)>에서는 상이군인 영호와 오랜만에 재회한, 설희의 인상적인 고백이 나온다. "전선에서 적들과 싸울 때는 총 하나만으로 맞설 수 있었지만, 현실의 장벽 앞에선 이 총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간호장교로서 후송 병원에서 전쟁의 일익을 담당했던 설희의 말에는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단일한 것에서 복합적인 것으로 변할 때 겪는 정신적 혼란이 나타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나(我)와 저편(彼我)의 식별이 표면적인 '전쟁'이라는 사태와 달리, 개인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현실'이라는 사태로 옮겨간 혼란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극복해야 할 적이 외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스로에도 있다. 이런 싸움은 현실에 비친, 개인만이 소유한 트라우마 또는 결핍 의식과의 대결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고독하다.


유현목 감독 <오발탄(1961)>에서의 설희와 영호


고독한 싸움을 현실에서 끌고 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고독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는다. 여러 군데에서 범람하는 매체와 급속히 퍼지는 소문(gossip)들은 고독하게 되는 일이 곧 사회에서 패배자(loser)가 되는 길임을 모두에게 전파한다. 설령 모두가 고독하다 해도 말이다. 이에 사람들은 개인적 욕망과 결핍으로 점철된 고독을, 타인을 포섭하는 일로 이겨내길 시도한다. 이수진의 소설들에는 고독한 개인들과, 그들이 서로 맞닥뜨리는 현실과, 서로의 고독을 이용하여 자신의 고독한 현실을 덮으려는 대결이 있다. 그들이 믿는 종교는 '내가 썩지 않았다는 증거'를 세상에서 찾으려는 발버둥이고(<마니차>), 그들이 사귀는 애인은 꿈에 빼앗긴 현실감각을 되찾아오기 위해 현실에 세워 놓은 지표이며(<대단히 멋진 꿈>), 그들이 사는 집은 거주지에 대한 타인들의 시선을 벗어나고파 하면서도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 정주하기를 갈망하는 장소이다. (<전발 씨>)


소설집 <머리 위를 조심해>에 실린 소설들은 '개인 대 개인'이라는 만남에서 서로가 수단이 될 뿐이다. <대단히 멋진 꿈>에서 아침마다 꿈속을 헤매는 '나'를 깨워주는 애인은 확실이 '나'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이 오래전에 소각한 파자마를 입고 나타난 애인을 본 뒤 '나'는 현실의 지표를 잃는다.(p.249) 그리고 '천장에 붙은 갑충' 따위를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애인의 등가물로 취급하게 된다. 개인과 개인 사이에는 충족되지 않는 개인적인 욕망이 가로놓여 있다. 


특히 <마니차>에서는, 서로의 욕망을 매개로 만난 관계가 너무도 절실한 고독을 품고 있기에 '죄를 짓기 위해 죄를 지었고 바란대로 죄를 지'은(p.37) 김준규의 변론은 그에게 납치되었던 구원자 '목자'마저 그를 '평생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인정하게 만든다.(p.52) 김준규는 목자가 지어낸 열 가지 계율을 차례로 어기며 자신을 전도하러 온 박양희와의 관계, 또 목자와의 관계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계율을 위반하는 김준규 '악한' 행위에는 죄인과 속죄자로 밖에 남지 못했던 그와 어머니의 불완전했던 관계가 뿌리로 심겨 있다. 박양희 또한 아이를 더나 보내고 남편과도 별거하는 불만족스런 삶을 이겨내기 위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다. 하지만 전도하려는 목적을 앞세우고 김준규를 만난 후, 김준규에게 불순하지만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 주리라는 이성적 호감을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그녀는 전도자로서 가져야 할 사명감마저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그의 엄마가 그를 위해 기도할 때 일말의 수고로움도 느끼지 않았듯 그와 내가 가족이 되었다면 어땠을까?(p.67)


타인을 포섭하려는 의지를 자각하는 시점에서, 종교나 관계의 명목(<대단히 멋진 꿈>에서의 애인관계 등)은 고독한 현실 속에서 산화한다. 고독은 말해지지 않지만, 어쩌면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우리는 서로를 보며 서로의 고독을 듣고 있다.


2. 위험 앞의 개인들


개인의 어원을 추적해 올라가다 보면 자연히 집단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귀결된다. 개인은 본디 'individual'이라는 단어를 일본에서 메이지(明治) 시절 '일개인(하나의 따로 된 사람)'이라고 번역했다는 데서 첫 쓰임을 찾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본시 individual에 담겼던 하나로서의 완전한 인격체라는 서양의 개념이, 동양에서는 단체 내지 사회로부터 고립되거나 분리된 존재로 밖에 인식되지 못했다. 이런 한계는 근대 시기 사소설(일상생활이나 주변 인물들에 대해 쓴 경수필 같은 소설) 등에서 적잖이 발견된다. 문화 발전과 역사를 추동하는 개인이 아니라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이불>이나 위다푸(郁達夫) <침륜> 등에서 나타나는, 자신만의 내밀한 욕망을 충실히 고백하는 개인은 동양권 문화에서 오래도록 굳어져 온 형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60년대 김승옥과 최인호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고, 30여 년 간 최고조에 달한 민중 담론을 지나, 90년대 윤대녕과 신경숙의 소설 등에서 다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상실과 복원을 모두 경험한 '개인'은 최근에까지 사회에서의 거대 담론과 적폐에 유일하게 저항할 수 있는 '작은 목소리'들로 인정받고 있다.


작은 목소리를 발견한 순간은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 단연코 중요한 사건이다. 다만 어쩌면 오래도록 '개인'이 아니라 '일개인'이 본질적으로 처한 위험을 여전히 묵과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편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강명의 장편 <표백>에서 주인공의 애인 '세연'은 불공평한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자살한다. 그녀가 쓴 유서는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되고, 수많은 네티즌이 그로부터 자살에 대한 암묵적인 '권고'에 호응한다. 개인이 외치는 작은 목소리를 증폭시킬 앰프는 스트리밍이나 SNS를 통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따라 작은 목소리는 여러 호응 속에 새로운 거대 담론과 같이 변모하며, 정보의 진위 판단을 떠나 개인들은 거기에 가장 사적인 감정을 기꺼이 내어준다. 즉, '개인 대 개인' 관계에서 한쪽이 '일개인'임을 감추고 '집단의 일원'임을 강조할 때, 혹은 그 반대편이 스스로 화해하지 못한 과거를 갖고 있을 때, 개인은 '개인 대 사회'의 위험에 맞닥뜨린다.



<전발 씨>에서 '나는 가난해 보였지만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p.173)고 자부했던 주인공이, 향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해 같은 동네 성범죄자의 표적이 된다는 생각을 품는다. 하지만 그가 사는 '널찍한 주택 이층을 한없이 좁은 관처럼' 느끼게 만든 근본은 성범죄자 '전발 씨'에게만 있는가?(결국 마지막에 '전발 씨'가 성범죄자라는 것이 터무니없는 오해였음이 밝혀진다) 그 근본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서울 월세방 곳곳을 표류하는 요즘 청년이면서도 '서울'로 대표되는 번영과 가능성이 풍부한 장소의 주민을 자처하는 주인공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깔린 상경한 이방인으로서의 불안과 언제 잘릴지 모르는 직장과 모든 정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개인의 약한 안전성과 함께 뒤섞여 있다. 개인의 이러한 부유성(浮游性)이 지각되지 않은 위험을 지각되도록 만든다. 


서울 주민이라는 보지 않는 정체성을 표면적으로 가졌음에도 계속 서울에 안주하고픈 욕망이 '나'를 서울에 한이 맺힌 '오갈 데 없는 지박령'(p.206)으로 남게 하는 것이다. 전발 씨에 대한 괴담은 '나' 외에도 곳곳을 부유하는 지박령들이 자신들을 위험한 타인들과 구별지음으로써, 안온한 생활이라는 거대 담론에 편승한 목소리들의 합이다. 작가는 범죄자'일 뻔했던' 전발 씨의 말을 빌어 '위험한 상태를 만들고 있는 위험'을 넌지시 내비친다.


많은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필요 이상의 것들을 알게 되어 버린다는 뜻이라네. 알게 된다는 건 타인의 삶에 갈신거리고 싶어 진다는 뜻이고 말이야. (<전발 씨>,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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