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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환 Dec 11. 2020

[독서노트] 0(zero)의 발견

(요시다 요이치 지음, 정구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저자 吉田洋一

수학 서적을 읽고 처음으로 독후감을 써 보자 마음먹었던 때가 3년 전쯤일 것이다. 전에 소개해 놓은 <현대수학의 여행자>가 그 책이다. 아직도 떠오르는 것은 '말(言)'이라는 형태로 정제되지 않은 채 지면을 압박해 오던 수식(數式)들과, 챕터 간 공통점이 없이 현대 수학의 난제만 소개하기 급급했던 두서없는 구성방식이다. 당시 썼던 독서노트에서 나는 '학제 간 통합이 이뤄지지 않던 시절'에 쓰인 책인지라 현재 독자들과 맞지 않는다는 논조로 글을 썼다. 그런데 이번 책을 읽고 나니 그보다 더 핵심적인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독자층을 잠재적으로 설정하고 글을 쓸 것인가. 아무리 많은 정보가 들어 있는 책이라 해도 그 책이 중국어 일색으로 쓰였다면 당연히 그 지식들은 중국인만 알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식 일색으로 쓰였다면 내용이 쉽든 어렵든 일반인보다 수학 전공자들에게 더 손길이 갈 것이다.


"이 작은 책은 수학에 대한 쉽고 대중적인 읽을거리다.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수학을 잘 모르고 이 방면에 낯선 분들이 이 책의 독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저자는 1939년 초판 서문에서 이렇게 밝혔다(무려 80여 년 전에 일본에서 수학 대중 도서가 이미 출판됐음에 꽤나 놀랐다). 누군가에게 서문은 으레 그냥 지나치는 부분이다. 하지만 저자의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입장 표명'이다. 적어도 책의 주제인 '0'을 수준 높은 수학 증명으로 탐구하려는 사람은 다른 범주에 있는 책을 찾을 테니까. 그리고 나머지, 저자 말대로 "이차방정식이나 피타고라스의 정리나 로그 같은 용어 정도는 수험 생활의 악몽으로나마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 이 책을 찾을 것이다.


인도 고대 숫자 중에서 0을 찾아보시라 (출처: www.storyofmathematics.com/indian)



역시 첫 장에서부터 '주판(주산)'의 유래라는 주제를 부담 없는 역사 이야기로 다룬다. 그렇다고 이 내용이 작은 읽을거리에 그치지 않는다. 0이 숫자로 쓰이게 된 배경엔 직접 더하고 빼 보는 '주산'에서, 종이에 숫자를 일일이 기록해 계산하는 '필산'의 시대로 넘어가던 시대변화가 있었다. 또, 인도의 특이한 셈법도 한몫했다. '만, 십만, 백만'하는 식으로 세는 동아시아와 'a thousand, 10 thousand, 100 thousand' 하는 식으로 세는 서양권과 달리, 십만, 백만 등과 같은 단위에도 인도인들은 일일이 이름을 붙이곤 했다. 예컨대 507,412를 말할 때 만 단위도 '0만'이라는 식으로 언급을 해 준다는 뜻이다. 이렇듯 0의 배경을 설명한 후에 저자는 비로소 더 나아간 개념인 이진법, 무한소수 등의 개념을 설명한다.


책을 증보할 때 추가된 부분인지, 책의 후반부에는 '연속과 단절'을 주제로 그리스의 '순수 수학'과 이집트의 '실용 수학' 사이의 차이, 피타고라스의 형상수(예컨대 1, 3, 6, 10... 등의 수열은 각각의 수를 돌멩이 개수로 생각하고 놓으면 넓이가 일정히 커지는 정삼각형을 이룬다), '그리스 3대 작도 난제'와 같은 이야깃거리가 소개돼 있다. 여기서 수식은 그저 언어로 설명된 것을 축약해 표현해 줄 뿐, 설명은 주로 이런 식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즈음의 그리스 기하학은 피타고라스 시대의 소박한 감각적 기하학의 수준을 벗어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미 점은 크기가 없으며, 따라서 선도 폭이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눈에 보이는 점이나 선은 모두 크기가 있으며, 또 폭이 있는 것뿐이었다. ... 어떤 도형이 존재하고 어떤 도형이 존재하지 않는가를 정할 때 어떤 기준이 필요하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p.151)


그리고 읽는 내내

아, 여기서 수학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깨달음들.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고대 수학이 발전한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지도까지 활용했다. (p.113)


잠시 딴소리를 해보자. 요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를 연습 중인데, 연주하다 보면 말로 설명이 안 되지만 음악적으로 어떤 흐름으로 연주해야만 할 것 같은 패시지(passage)가 있다. 사실 수학도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수학만이 가진 언어로만 의미를 전해야 할 시점이 보이는 듯하다. 고등학교 때 한 수학 선생님은 함수를 미분할 때마다 항상 '시원한' 감정이 든다고 하셨다. 공감은 했지만 그 이유를 물어보면 다시 미분계수가 어쩌고 저쩌고...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베토벤을 연주하기 전 베토벤의 음악세계를 대강 알았듯이, 수학도 공부하기 전 친숙함이 필요치 않을까. 어쩌면 이 책 <0의 발견>을 좀 더 일찍 읽었다면 그 친숙함으로 이끌어 줄 동기 중에 하나가 될 수 있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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