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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전후의 두 현실이 마주치는 곳-1

영화 <아키츠 온천(1962)> 평론

by 철환

개인적으로 일본 쇼치쿠 고전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요시다 요시시게(aka. 요시다 기주 吉田喜重), 나중에 닛카츠 영화사로 이직한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 등 감독들의 작품들은 패전 직후의 일본인들이 어떻게 '일상'을 꾸려나가는지, 그 와중에도 불쑥불쑥 나타나며 일상에 균열을 내는 전쟁의 기억을 예술적 감각으로 묘사한다. 한국에서 이들 영화를 취급하는 플랫폼이나 입수할 만한 통로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저 너무 안타까울 뿐(그나마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몇 편이 넷플릭스에서 풀린 건 다행이다).


젊은 시절 슈사쿠의 손의 온기를 중년 슈사쿠에게서 다시 찾아보는 신코


요시다 요시시게 감독의 <아키츠 온천(1962)>은 남주 슈사쿠(周作)와 여주 신코(新子)의 러브 스토리를 중심으로 '황국'이데올로기가 붕괴한 전쟁 직후의 일본 사회를 그려낸다. 전후 일본은 패전이 가져온 황폐함도 잠시, '한국전쟁 특수'에 힘입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누리고, 일본인들의 기존의 생활양식은 거대한 변화를 겪었다. 더러는 슈사쿠처럼 도시로 나아가 배금주의입신양명을 좇는 속물이 되어갔고, 더러는 신코처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추억의 장소에 정주하며 새 세대로부터 청산을 기다리는 옛사람이 되어갔다.


1. 줄거리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망이 2달 남은 시점, 대학생 카와모토 슈샤쿠(이하 슈사쿠)는 결핵에 걸린 몸으로 귀향했지만 집은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잿더미가 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뒤이다.

미군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고향집에 돌아온 슈사쿠(右)와 이웃집 부인


슈사쿠는 이모의 집이 있는 돗토리 현으로 향하는 피난열차에 오르지만,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도중에 내려 아키츠 온천으로 도피해 거기에서 죽음을 기다리기로 한다. 거기에서 그와 마주친 사람은 십 대 소녀 신코(새로이 기예와 몸가짐을 익힌 유녀 및 예인), 아키츠 여관 여주인의 딸이다. 여관에는 일본 장교들이 배석하고 있었는데, 신코는 술시중을 거부하다가 군인의 노여움을 사서 옆방으로 숨어들었고, 그곳에는 슈사쿠가 죽어가고 있었다.

신코에게 함께 죽기를 권유하던 슈사쿠였지만, 신코의 정성 어린 간호로 슈사쿠는 점차 기력이 회복된다. 나아가 그는 신코로 인해 자신이 생에의 의지를 다시 찾았음을 고백한다. 두 달 후, 패전을 알리는 천황의 옥음방송에 뒤따른 좌절도 잠시, 여전히 둘은 서로의 생명력과 사랑을 확신한다. 하지만 아키츠 여관 여주인의 냉대를 받은 슈사쿠는 다시 거리로 나서고, 신코는 슈사쿠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어머니로부터 여관을 물려받는다.

생명력이 넘치는 신코(右)에게서 살아갈 의지를 찾은 슈사쿠


그 뒤 수년, 17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슈사쿠는 결혼을 하고 소설가로 데뷔하지만, 가난한 작가로서의 자격지심과, 아내가 딸을 데리고 가출한 뒤 가장으로서 실패했다는 좌절에 휩싸여 쉽게 삶의 의지를 잃는다. 그때마다 그는 아키츠 온천으로 가 신코를 찾는다. 그녀는 무력해진 몸으로 돌아오는 슌사쿠를 언제나 사모하고 반갑게 맞이하면서도, 슌사쿠로부터 자신의 생기가 앗아가지는 듯한 무력감과, 그의 결혼생활에 자신이 훼방을 놓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작가로서 사회적 성공을 거둔 후 마지막으로 여관을 찾은 슈사쿠, 그와 세월의 흐름 속에 늙어가며 여관 폐업을 준비하게 된 신코의 사이에는 정욕 이상의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 밤을 함께 보내면서, 신코는 17년 전의 슈사쿠처럼 이번에는 슈사쿠에게 함께 죽기를 간청하지만 슈사쿠는 농담으로 받아들인다. 이튿날 신코는 슈사쿠를 전송한 후 끝내 손목을 긋고 스스로 강물에 빠지고, 슌사쿠는 가던 길을 멈추고 신코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2. 포스트-식민지인, 양가적 감정


간혹, 한국인으로서 전후 일본 사회를 그린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양가적 감정을 무시할 수 없다. 이 감정은 '대일본제국'을 향한 비판의 시퀀스들이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과 태평양 전쟁에 희생당한 식민지인들의 존재까지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한 분개와, 총동원령과 1억 총 옥쇄라는 잘못된 국가권력에 희생되는 일본 ‘국민’들의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부터 전달되는 공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한국인은 해방 후에도 어쩌면 피식민의 기억을 능히 잊도록 할 만한 많은 사건을 겪었고, 현재 한국 사회의 주역들에겐 식민지의 직접적인 기억이 없다. 하지만 그간 구조적으로 안착한 제국주의적 인습과 함께, 이것을 역사적 의미에서 재발견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후대로 이어져 왔다. 때문에 우리는 국내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近)과거를 돌아볼 때마다 반사적으로 '식민지'라는 갈피를 찾아내게 된다.

술 시중을 거부하는 신코에게 열이 받아 '불경죄'를 들먹이며 신코의 모친을 위협하는 일본 장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까지, 스크린에 비친 신코와 아키츠 마을사람들은 우리의 조부모가 한반도에서 그랬듯이 모자를 벗고 황궁을 향해 경례하거나 황국신민서사를 외운다. 그리고 '성스러운 전쟁(聖戰)'에 임하는 군인들에게 마지못해 경의를 보이며 그들의 비위를 맞춘다. 그 와중에 여관 구석에서 홀로 결핵을 앓는 슈사쿠는 전시체제에서 군의관의 말대로 '약조차 아까운' 존재이다. 그런 잉여의 존재와, 그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는 신코를 카메라는 끈질긴 투샷으로 쫓아가면서, 군국주의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순수한 휴머니즘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제국주의 비판은 당시 조선인들이 처한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 놓여 있다.

전후 일본 사회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위험을 초래한다. 첫째로, 전후 일본의 변화 양상을 관객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타자로서의 일본을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에 섣불리 끌어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문학 연구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는 다음과 같이 밝힌다.


세계대전 후 제3세계에서 부흥한 민족주의는 식민주의자들의 기술과 문명을 적극 흡수하면서도, 국가 발전의 지향점으로는 역설적으로 침략 이전의 신성화, 이상화된 역사로의 회귀를 추구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 모순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식민지 전후 시기를 여러 각도에서 끊임없이 분석하고 현재까지도 행정, 교육, 생활습관 등 곳곳에 산재하는 일제의 잔재를 스스로 근절하는 노력보다, 한민족의 서사를 신성화시켜 제국주의자들이 범했던 민족의 계급화쇼비니즘을 일으키는 데에 치중하도록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첫 번째 위험과는 상반되는, 피식민의 역사가 있는 한국인이 당시 일본인의 일상에 섣부른 공감을 표하는 데서 오는 구조적 왜곡의 문제가 있다. 근대 이전부터 일본인과 조선인은 근본적으로 분리된 민족 정체성을 가졌다.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은 표면적으로 두 민족 간의 차별을 없애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일본인을 향한 조선인의 봉사와 식민지 수탈을 정당화한 속임수였다. 이런 구조적 한계를 외면하고,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 국민도 국가권력에 의해 희생됐으니 조선 민족의 수난과 피차일반이라고 본다면, 이는 제국주의의 본질적인 과오를 우리 손으로 덮는 것이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 식민지 조선과 일본 본토와의 왕래가 드물었던 까닭에, 식민지 평민과 내지인 평민 사이에는 각자 느낀 고충을 단순 비교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대등하게 교류할 수 없는 심연이 생긴다.

슈사쿠는 결핵에 걸렸지만 군인의 치료를 우선시하는 시국에서 아무런 약도 처방받지 못한다.


광복 후 80년을 맞는 올해, 한일 관계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다. 그간 제국주의의 채 아물지 못한 상흔에 대한 채권의식에서 애써 전후 일본을 바라보기를 피해왔다면, 지금 전례 없는 용기를 내어 전후 일본인의 의식세계를 다시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아키츠 온천>은 우리가 역으로 민족서사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성숙한 자세로 일본을 대할지, 제국주의 이면에는 어떤 콤플렉스가 내재돼 있었는지, 나아가 우리 안에 남아있는 제국주의적 인습사회진화론적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해체할 지에 대한 문제와 직결된다. 과거의 일본을 막연히 용서하자는 말과도 다르다. 과거의 과오를 덮는 것이 아닌, 과거에 대해 다른 각도에서 대화를 열 수 있는 또 다른 키를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 안에 내재된 피해자의 모습을 피해자가 보아내는 것이기에.


(2편에 계속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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