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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전후의 두 현실이 마주치는 곳-2

영화 <아키츠 온천(1962)> 평론

by 철환

(1부에서 이어집니다)


3. 신코는 여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전쟁 서사는 늘 승자패자를 갈라 왔다. 그리고 패자 안에서도 수많은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그러한 목소리의 층차에 따라 패자는 목소리에 에워쌓이고 그 고통은 미화된다. 20세기 전반의 전쟁사에서 일본은 태평양전쟁 끝에 제국주의가 소멸하고 모든 식민지를 반환하는 등 완벽한 패자로 각인된다. 하지만 이것이 일제의 압제 하에 있던 식민지인의 목소리를 승자의 위치로 끌어올려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일본의 근현대사에서 대동아공영의 미몽이 물거품이 됨과 함께 식민지는 그 존재 자체를 묵인당하거나, 다시 제국주의의 시선 아래 연민의 대상이 됐다. 즉, 일본의 교과서 등에서 한반도의 식민통치는 '조선반도, 대만 등지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라는 짤막한 서술로 그쳤거나, 해방 후 5년 만에 북침으로 일어난 한국전쟁을 관망하며 보수 본류 우익들이 성전(聖戰)을 완수하지 못해 한반도를 불행에 빠뜨렸다는 기묘한 부채감을 느꼈다는 기록조차 남아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의 층차는 패전 후 일본 사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전쟁에서 패해 돌아온 남성들은 가치관의 붕괴를 겪고 유약한 존재가 되어 방황했지만, 스베틀라나 알렉시에비치의 말과 같이 '남자의 얼굴을 한' 전쟁의 영향은 전후에도 사회 전반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타자화하거나 남성의 목소리로 끌어들였다.

슈사쿠(右2)와 문인 동료들의 술판, 패전 후 남성 지식인들은 국가주의 가치관의 붕괴로 허무주의에 빠졌다.


<아키츠 온천>에서는 젠더에 따른 공간의 분리가 일어난다. 아직 전쟁이 한창인 때, ‘군인’, ‘대학생(슈사쿠)’을 비롯한 남성들은 연이어 아키츠 온천에 들어와 안식을 찾는다. ‘여관’은 본질적으로 환대를 노정한 공간이다. 아키츠 온천의 서사는 여관 여주인(오카미), 여관 주인 딸 ‘신코’, 여종업원(오타미상) 등과 남자 손님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흘러간다. 이런 구도는 오즈 야스지로의 종전 후 여성상과도 사뭇 다르다. 오즈의 여주인공은 가부장제 가족(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가족에 기여하는 능동적 행위를 통해 주체성을 얻는 데에 반해(<만춘>과 <맥추>의 말미에 타향으로 시집을 가는 여주인공들 역시 전통적 가부장제 안에서 행복을 추구한다), <아키츠 온천>의 신코의 주체성은 일체의 가정 및 사회생활과 단절된 아키츠 마을에 머물며 슈사쿠의 방문을 기다리는 수동적 행위를 통해 발견된다.

이 영화의 주제는 슈사쿠의 관점과 신코의 관점에서 따라 나뉜다. 슈사쿠의 관점에서는 전쟁을 통해 피폐해진 (남성의) 영혼이 아키츠 온천(여성)을 통해 생명력을 얻고 다시 사회의 정상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 신코의 관점에서는 자신을 떠난 연인이 돌아올 때마다 위로와 용기를 주면서 홀로 남은 자신의 생명력이 나날이 사그라드는 것이 주제이다. 신코는 첫 등장에서부터 슈사쿠의 시선에 비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장교들의 술시중을 뿌리치고 도망온 신코의 숨찬 얼굴과, 이불속에 숨어든 뒤 슈사쿠의 눈에 비친 신코의 맨발, 이불을 들추자 나타난 뜻밖에 태연자약한 신코의 미소는 이후에도 여성이 스스로 발화할 수 있을지를 의심케 한다.

이불 속에 숨어든 뒤 슈사쿠의 눈에 비친 신코의 맨발

슈사쿠는 두 번째 아키츠 방문 때 약혼자가 있으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신코에게 고백한다. 전쟁 직후 붕괴된 가치관을 슈사쿠는 (맥락상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가정을 꾸리는 것에서부터 다시 쌓아 올라간다. 이와 반대로 슈사쿠와의 사랑을 이미 최우선의 가치로 둔 신코는 추억의 장소인 아키츠 온천에 남아 슈사쿠를 기다릴 뿐이다. 가난한 작가로서의 자격지심과 가장으로서 실패가 슈사쿠를 아키츠 온천으로 인도해 올 때마다, 신코는 슈사쿠와의 사랑이 일시적인 밀회에 그치는 데에 절망해 슈사쿠를 밀어내면서도,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를 있는 힘껏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슈사쿠의 아내에게 죄책감마저 느끼는 신코는 전후의 황무지로부터 여전히 전통적으로 재건되는 사회에 무력화된 존재로 남으며 스스로의 욕망을 역시 전통적, 가부장적 목소리에 기탁한다. 결국 이 영화는 전후 일본 사회의 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잘 표현한 작품일지 모르나, 전후 또 다른 패자로 자리한 여성의 목소리를 전도시키는 데에는 나아가지 못한 듯하다.


私はいけないのよ、貴方の奥さんに悪い...私はどうしても貴方の奥さんのことが...
난 안 되겠어, 당신 아내에게 죄스러워서...어떻게 해도 당신 아내의 일이...


4. 마음의 고향과 가야 할 현실 사이에서


잠시 가까운 예를 들어보자. 한국은 이미 2018년을 기준으로 90.8퍼센트의 도시화율(전체 인구 대비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 비율, 2019년 통계청 자료)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고향'이라는 말이 품은 전근대적 인상이나 심적 치유라는 특성에 공감하는 세대는 점점 사라져 가는지도 모른다.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 이전 세대에게 '고향'으로 각인됐던 장소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보다 개인의 주관적인 감각과 경험으로 결정되게 된다.

이러한 변화를 일본이 한 시대 앞서 겪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은 도쿄, 오사카, 고베 등을 중심으로 급격한 공업화를 겪음과 동시에 농촌 인구가 대규모로 도시에 유입됐다. 종전 후 일본은 국내의 많은 기반 시설들을 잃었지만, 이미 제국 시대에 축적된 기술력과 한국 전쟁 특수와 맞물린 타이밍으로 두 번째의 대규모 이촌향도를 겪었다. 이러한 변화는 <아키츠 온천>에서 '도쿄/아키츠'라는 도식으로 잘 나타난다. 슈사쿠의 일상이 펼쳐지는 도쿄는 낯선 사람들이 매일 어깨를 부딪히며 지나가는, 자연으로부터 동떨어진, 일과와 휴식이 구분된 곳이다. 반면 아키츠는 그리운 신코가 있고, 젊은 시절 결핵을 치유했던 맑은 공기가 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의무로 주어지는 이상적인 곳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상상에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와는 달리, 현실적 공간이면서도 일상에 편재하는 권력을 전복시키고 와해시키는 낯선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로 규정한다. 신코가 천황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방송을 듣고 여관으로 돌아와서야 눈물을 흘린 것, 그리고 슈사쿠가 신코의 눈물에 감동을 받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로, 아키츠 온천에서는 어떤 이념이나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휴머니즘’이 발현된다는 것, 둘째로, 아키츠 온천에서는 권위, 명령, 이성 등의 절대적 정체성이 힘을 잃고 평등(사랑), 이해, 감성 등의 관계적 정체성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슈사쿠는 사회에서 가장, 교사, 소설가, 저널리스트 등의 지위를 갖지만, 아키츠 온천으로 돌아오는 순간 ‘슈사쿠’ 그대로의 모습이 된다. 두 번째 아키츠 방문에서, 그는 신코를 골려주려 기녀 두 명을 옆에 끼고 술을 마신다. 하지만 신코의 진심 어린 애정에서 나온 실망과 원망은 슈사쿠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남성적 권력마저도 포기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아키츠 마을은 다시금 일체의 위계질서와 폭력을 벗어난 생명력을 회복하는 헤테로토피아로 존재한다.

종전 후 17년이 흘러, 신코는 슈사쿠와의 추억이 깃든 여관을 기업에 매각한다.

하지만 전후 일본은 급격한 자본주의의 발달과 도시화를 겪는다.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했던 사회는 이제 ‘’과 ‘출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국민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문화학자 미요시 마사오(三好将夫)는 전후 지식인들이 천황체제의 해체가 아닌, 다시 탈아입구를 통해 서방과 경쟁하는 자유로운 개인/국민이 되는 것을 국가적 과업으로 삼은 것을 비판했다. 이는 소비주의를 통한 개인/국민의 사회지위를 높여 사상적 공허를 메우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아키츠 온천>에서도 그 근본적인 문제점이 드러난다. 슈사쿠와 신코는 전쟁의 상처를 딛고 휴머니즘을 얻었지만, 아키츠라는 공간은 슈사쿠에게 새로운 생활을 설계하는 공간이 아닌 도피처에 불과했다. 슈사쿠는 언제나 기약 없이 기차에 몸을 싣고 나타났다가, 언제 온다는 약속도 없이 다시 도쿄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아키츠에서 얻은 슈사쿠의 생명력은 신코와의, 과거의 첫 만남 이래로 더 이상 새로워질 것이 없는 관계를 양분으로 삼으면서 재생될 뿐이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슈사쿠는 점점 속물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찾아온 아키츠 온천에서는 신코를 향한 정욕밖에 남지 않게 됐다.


生きるとか死ぬとかってのはね、そんなのは昔のことなんだ。
산다던지 죽는다던지, 그런 것은 옛날 일인 거야.

아키츠 온천마을에는 기업 자본이 들어와 관광호텔이 건축되기 시작했고, 신코의 여관 역시 매각된다. 노쇠한 신코는 바뀌어가는 아키츠 마을의 풍경을 뒤로하고, 이제는 여주인이 아닌 다른 여관의 종업원으로 몸을 의탁한다. 전시의 기억의 공간이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아키츠’라는 곳의 헤테로토피아적인 성질이, ‘국가’에서 ‘자본’으로 모습을 바꿔 등장한 권력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암시한다.


대단원에 이르러 슈사쿠는 죽은 신코를 품에 안고 망연자실한다. 요시다 감독은 어떤 말이 하고 싶었을까. 전후의 일본인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전쟁을 감내한 작은 개인들의 휴머니즘도, 다시금 서구열강에 편입되기를 꿈꾸는 근면함과 경제제일주의도 아닌 다른 어떤 것이었을까. 아키츠 마을이 근본적으로 무너질 운명에 처한 장소였다면, 아키츠를 통해 아키츠가 보여주지 않은 것을 찾는 것은 관객의 몫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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