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이 껍데기 장례문화 상엿소리 진혼가
유족은 아픈데 호상이란다
한 세상이 무너졌다. 유족은 아픈데 호상이란다. 효도를 다 하지 못한 회한으로 자식들은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부짖는다. 아무리 장수를 한다 한들, 부모에게 죄인 아닌 자식이 있을까. 코로나 19로 면회마저 막혀버린 1년이었다. 아무리 말기 치매라고 한들, 자식들의 이름마저도 잃어버리다니. 배 아파 낳아 기른 어느 자식 하나 애틋하지 않은 자식은 없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당신의 사랑만 고스란히 남았다.
죽음 앞에서 정녕 외롭고 무섭지 않을 이 누가 있을까. 멀리 있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서 돌보지 못한 회한만 남았다. 몸이 불편해서 걷지도 못한 모친을 요양원에 맡겨 놓고, 늘 불편한 마음으로 마음 언저리가 무거웠던 날들이었다. 다행히 요양원에 근무하는 동생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지만, 누가 부모님 앞에 죄인 아닌 자식이 있을 것인가. 비록 당신의 몸은 우렁이 껍데기가 되어도, 자식 걱정 한평생 사랑뿐이었다. 들로 산으로 바다 갯벌로 곱던 손이 나무껍질이 되어도, 동동 구루무도 아끼던 어머니였다. 이렇게 가는 것을,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다 잊고 가는 것을, 아끼고 아껴가며 해마다 살림 늘려 가던 그때,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허리띠를 졸라맸을 어머니.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 입지 않았던 어머니.
언제부턴가 장례문화도 바뀌었다. 아버지 장례식 때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장례를 치렀다. 돼지고기에 무와 두부를 넣어 고춧가루에 팔팔 끓던 찌개는 상갓집에 대표 음식이었다. 삼시 세끼 제사상을 차리며 곡을 하며 슬픔을 달랬다.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안식하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상엿소리는 자손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했고 북망산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요즘 장례식에는 종을 울리며 저승과 이승 사이를 이어주던 진혼가도 없다. 누구 없이 상을 당하면 장례식장에서 치른다. 곡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곡소리 대신 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며 고인을 위로한다. 빨리빨리 간편한 것을 추구하는 생활방식이 장례문화도 바꾸어 놓았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 해도 고인에게 애도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부모를 보내는 마음도 애틋하기만 하다.
살아생전에 그 멍석은 무엇하려 손가락이 짓무르도록 만들었는지. 저렇게 마른 먼지 일으키며 썩어서 버려지는 것을.
자식이 아프면, 몸에 좋다는 보약을 연기를 마셔가며 밤늦도록 가마솥에 달여주셨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성치 못한 딸자식 때문에 사돈 앞에 늘 죄인이었다. 부모가 되면 다 그래야 하는 걸까. 당신 몸은 뒷전이고 모든 것 자식을 위해 살다 가신 세월. 오직 자식 잘되는 것만 빌어 주시다가 돌아가셨다.
코로나 19로 인해 조문객을 받지 않고 가족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구순을 넘겼으니 호상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기야 옛 선비는 부모상을 당하여,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지 않았던가. 그것은 내가 먼저 부모 앞에 가는 불효를 드리지 않았으니, 다행이어서 춤을 추었단다. 우리도 행여 장례식장에 가서 호상이라 말하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에 호상은 없다. 아무리 장수를 한다 한들, 호상은 없다고 생각한다. 극진히 모시지 못한 자녀들은 속 깊은 회한뿐이다. 평생 일하다 가신 분은 무엇을 남겼을까.
이 세상 살아내는 일은 고난의 길이다. 장례식장에 수많은 화환이 가는 길에 위로가 되었을까. 젊은 날, 자식 뒷바라지에 살아내려 힘들었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을 겪으며 죽을 고비 넘기며 살아온 세상이었다. 나이 들어 병들어 아프고, 혼자 남아 외로움 감당할 이 누구던가. 위태로운 유리잔 같은 인생, 언제 깨질지 아무도 모른다. 숨 쉬고 사는 동안, 일손을 놓지 못하는 우리네 인생이다.
“내일 죽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
하는 명언을 빌리면, 힘이 있는 동안은 일손을 놓지 않는 일이 살아있는 이유란다. 제아무리 힘이 있어 욕심을 부려도, 유수 같은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고 손가락 사이를 새어 나가 버렸다.
젊음의 뒤안길에 풀잎처럼 마르고 말라 사라져 가는 것을. 재물이 많은 들 무엇할까. 가는 길에 수의 한 벌, 가벼운 나무 관 한 개가 족하지 않던가. 올 때는 엄마 품에서 왔지만, 갈 때는 저마다 혼자 가는 길이다. 하늘나라 올라가면 먼저 간 사랑했던 지아비를 만날 수 있을까. 어려서 잃어버린 엄마의 어머니를 만날 수 있을까. 너무 일찍 생을 놓아버린 어머니의 부음을 나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의 집이 허물어졌다. 작은 집에서 큰집으로 이사하며 좋아하던 어머니 집을 허물었다.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집을 지켜내지 못했다. 빈집을 살뜰히 돌보지 않으면 집은 자동으로 수명이 짧아진다. 마치 죽어가는 고목처럼 쓰러져간다. 어머니가 가신지 몇 년이 지나자, 집도 어머니를 따라갔다. 철거하는 것을 보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싶다.
우지직 쓰러져가는 집의 울음소리를 나는 멀리서 들었다. 그 집은 우리 남매들의 어릴 적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집이었다. 뒤란에 시원했던 샘물, 비가 오면 졸졸 흐르던 물소리가 좋았다. 여름이면 물맛이 좋아 점심시간이면, 줄줄이 주전자를 들고 물 뜨러 오던 아이들이 있었던 집.
여름밤 마당에 멍석 깔아놓고, 그 위에 누워 하늘을 보며 부채를 부쳐주며 별자리 알려주던 어머니였다. 우리는 별 이야기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북두칠성은 국자 모양이라고 알려주었고, 새하얀 바다는 은하수라고 일러주었다. 송사리별, 견우와 직녀별까지 어머니는 모르는 별이 없었다. 도깨비 이야기는 무서웠다. 콩쥐·팥쥐 이야기는 콩쥐가 불쌍했다. 마당에 누렁소는 송아지를 키우고, 어머니는 어린 우리를 키웠다. 아버지는 마른풀과 쑥으로 모깃불을 피웠다. 모기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연기를 피워 쫓아주었다. 한없이 정겨웠던 여름밤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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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장사꾼들에게 기꺼이 방을 내주었다. 저녁이며 아침까지 먹여서 보냈다. 차가 다니지 않는 마을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한 번 동네에 들어오면 날이 저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약장사, 바구니 장사, 청 장사(벌꿀), 비단 장사, 이불 장사 장사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삶에 필요한 도구들을 등에 짊어지고, 머리에 이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마을마다 찾아다녔다. 생활이 어려운 친구에게는 양식도 나누었다. 나눔의 삶을 살았으니, 강 건너 그곳에서 반겨 주었을까.
초가집 마당에 고주박이 주렁주렁 열리면, 길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유자나무 한그루, 세월이 흘렀어도 참 많이도 열매를 달았다. 어머니는 유자 껍질이 약이라며 말려서 달였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당신이 만들어 주신 유자청은 여전히 노란빛을 발하고 있다.
손목이 아프도록 자식을 생각하며 썰었을 그 시간이 가슴을 파고든다. 어머니가 주신 그 유자청은 마트에서는 절대 사 올 수 없는 진한 향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이 머물렀던 집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자리매김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다. 오늘은 오랜만에 유자청 한 숟가락을 들어내어 따뜻한 물을 붓는다. 향기가 온 실내에 퍼진다. 언제 맡아도 향긋한 이 향기는 어머니의 따뜻했던 가슴이다.
어머니 손
새하얀 도화지에 고운 물과 붓은 없었지만
호밋자루 붓을 삼고 논밭을 도화지 삼아
채소와 곡식으로 그림을 그리시고
잿빛 물감 되어 갯벌 뒤지느라 손톱이 뭉그러진
울 엄니 손!
머리 아프면 머리를 짚어주시고
배 아프면 배를 쓸어주셨던
따스했던 울 엄니 손!
거북 등 같던 손으로
자장자장 다독이며 자장가를 불러주던
정겨웠던 울 엄니 손!
오일장 한 귀퉁이 한쪽 자리 잡고 앉아
어머니의 땀을 팔아
사랑을 사 오셨던 울 엄니
모진 세상 소나무처럼 푸르렀던 울 엄니
고달픈 세상 돌아누워
아기처럼 순해진 울 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