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물 속에서 미래를 써내려가다

원하는 것을 조각해나가는 사유 과정

by 꼬모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온천탕은 노천탕이다. 특히 추워질수록 바깥의 차가운 공기와 탕 안의 따뜻한 물이 만드는 온도의 대비는 따뜻한 물을 더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


혼자 가만히 앉아서 할 게 없으니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 대학교를 휴학하고 인턴을 하고 있는 시점까지의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1. 초등학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보는 장면이다. 그러다가 잠이 들거나, 저녁 먹을 시간이 되면 졸린 눈으로 식탁에 앉곤 했다. 바깥에서 가끔 친구들과 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집에서 혼자 책 읽는 걸 가장 좋아했다. 특히 나만의 상상 세계에 빠질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했는데, 모험심 가득한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을 가장 좋아했고, 좋아하는 책들은 읽었던 것을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위인전도 꽤나 많이 읽었는데, 나중에는 위인전 읽기를 중단하겠노라 선언했다. 위인도 결국 남들과 다를 바 없이, 흠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 것은 내게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취미로 했던 바이올린은 계속 학원을 다녔고, 5학년 때인가 6학년 때에는 도 대회에서 은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매번 바이올린 선생님이 '너 전공하고 싶어?'라고 하면 단호하게 '아뇨, 저는 소아과 의사가 되어서 아이들한테 바이올린을 연주해줄 거예요.'라고 얘기하기도 했던 나름의 뚝심이 있던 아이이기도 했다.


학습지 같은 것이야, 매번 미루었지만 영어 학습지인 윤선생을 할 때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침마다 윤선생의 담당 선생님이 전화 오셔서 숙제를 했는지 확인하시곤 했는데, 그때 동사 read의 과거형은 같은 스펠링이지만 발음은 달라진다는 걸 기억하고 정확히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거기에 놀라 칭찬해주셨던 선생님까지! 그러니 영어는 좋아하기도 했고, 나름 혼자서 잘 따라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 따로 몇 명을 불러 코딩을 배우게 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걸 즐겼던 적은 없다. 내가 입력한 대로 출력되는 결과물이 나름 재밌기도 했지만, 프롬프트 창은 지루한 화면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중학생 때에도 초등학생 시절의 이력(?)으로 C언어 대회에 몇 번 나가기도 했지만 모든 단계가 서로 정확히 맞물려야지만 답이 나오는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이야 오류가 나는 프롬프트를 챗 지피티에 넣고 오류가 나는 부분을 알려달라고 하면 되지만, 그 사소한 오류의 원인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게 재미 없었던 것이다. 아마 챗 지피티가 그때에도 있었다면 훨씬 재밌게 배웠을 것 같다.


집에 있는 노트북으로 재밌는 걸 발견하기도 했는데, 그건 파워포인트였다. 파워포인트의 애니메이션 효과를 이용해서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프린트기에서 종이가 뽑히는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프린트기 사진의 위 아래를 잘라 종이 사진을 그 중간에 위치시키고, 애니메이션 적용 위치를 적절히 조절하여 만들어낸 사소한 경험은 뿌듯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것도 좋아해서 종종 초등학교 안에서 열리는 UCC 대회에 참가하곤 했다. 친구들을 섭외해서 인터뷰 영상을 찍기도 하고, 담임선생님과 협심하여 뮤직비디오를 만든 적도 있다. (뮤직비디오 편집은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던 것 같다.) 영상 제작에 더해서 이벤트를 만드는 것도 좋아했는데,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벤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엄마의 생신 때 동화책에서 봤던 서프라이즈 선물을 따라한 것이었다. 집 여기저기에 쪽지를 숨겨두고, 하나의 쪽지를 찾으면 그 다음 쪽지를 찾게끔 하여 결국 마지막 쪽지는 선물로 이어지게 하는 이벤트였다. 학교에 가기 전 엄마에게 첫 번째 쪽지를 주고, 나중에 문자로 엄마의 감동 폭발 반응을 확인했다. 뿌듯함과 동시에, 이 치트키를 너무 일찍 써버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두 번째는 초등학교 졸업식 날 담임선생님을 울린 이벤트이다. 선생님의 첫 제자가 우리 반이기도 했었고, 졸업식이니 반 친구들에게 함께 서프라이즈를 하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나 남자 아이들이 유난히 비협조적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나는 결국 집에서 혼자 프린트를 하고, 종이 양쪽에 나무젓가락을 하나씩 붙여 한 명씩 들 수 있는 작은 플랜카드들을 30개 정도 만들었다. 그걸 졸업식 날 가져가, 일렬로 앉게 될 반 친구들의 순서를 고려하여 무대에 올라가 계신 담임 선생님께 글자가 하나씩 보이도록 연출했다. 예를 들면, '선', '생', '님', '1년', '동', '안', '감', '사', '했', '어', '요'가 차례대로 보이는 식이다. 그렇게 한 바퀴 돌고 나서는 종이를 뒤로 돌려 두 번째 문장이 보이도록 했다. 그걸 보신 순간 선생님은 무대 위에서 등을 돌려 눈물을 숨기신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듣기로는, 뒤에서 그걸 본 학부모님들까지도 감동하셨다는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누군가에게 놀라운 감동을 선사한다는 것이 나에겐 큰 기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설렘에 가득 차서 망설임 따위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초등학생이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라면 더 즐거워했던 것 같다. 영상이 되었든, 누군가의 반응이 되었든.


2. 중학교

사서 선생님밖에 없는 조용한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던 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때 본격적으로 한국의 교육 제도에 포함되면서 근본적인 질문을 갖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런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이런 교육 제도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이런 문제 의식을 갖게 해준 것은 내가 어디선가 읽었던 책들, 주워들은 말들일 테고, 학교 도서관에서 북유럽 교육에 대해 접하게 되면서 반항심은 더 커졌다.


가장 좋아했던 것은 여전히 영어였고, 유일한 원어민 선생님에게 방과후에 찾아가 잠깐만 대화를 하자고 조르기도 했다. 하루는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영어 원서 책을 읽다가 'sarcasm'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접하고는 무슨 뜻인지 여쭤보았고, 선생님의 설명을 듣다가 'Aha, mirror of society?'라고 말하자 많이 놀라셨던 얼굴이 기억난다. 한 번은 선생님과 같이 하교를 했는데, 친구에게 너를 천재라고 얘기했다던 말도 기억난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도 어쨌든 나는 학교에서 영어 시험을 볼 때 항상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고, 질 높은 영어 교육을 항상 갈망했었다. 그때부터 유튜브로 팝송, 영어 브이로그 등을 보기 시작했다. 스킨케어나 화장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나이이니, 이왕 찾아볼 거라면 영어로 보는 식이었다.


그래서 한정된 교육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시 내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좋은 고등학교에 가는 것이었다. 야심차게 최고의 고등학교라 불리는 곳에 지원하겠노라 선언했고, 담임 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지, 가 아닌 회의적인 눈초리를 받으며 추천서를 겨우 받아들고 지원하였는데 결과는 실패였다. 준비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시험장에서 본, 초등학생 때부터 함께해온 컨설팅 선생님들과 안부 인사를 나누는 학부모들의 모습은 나에게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악동뮤지션의 '사춘기' 앨범을 들으면서 씁쓸하게 나 자신을 달랬다.


3. 고등학교

엄마와 약속한 대로, 근처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다른 외국어 고등학교로 편입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때는 의욕도 꺾이고 혼자 준비할 자신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접한 책으로 고등학생도 미국으로 유학을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부모님을 조르고, 내가 아는 학교 선생님들을 모두 찾아가 고민 상담을 했다. 유일하게 영어 선생님 한 분만이 '아싸리 그냥 가!'라고 해주셨다. 진로 선생님은 대학교 가서도 그런 기회는 많이 있으니 지금 성급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고, 이것이 대다수 어른들의 의견이었다. 나는 그 많은 어른들, 특히 부모님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고 그럼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을 하든, 유학을 가든 외국으로 가야겠다고 스스로 타협했다.


그때 내가 가장 결핍했던 것, 그래서 갈망했던 것은 깊이 있는 교육이었다. 그런 나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였던 학교는 세인트존스 대학교이다. 4년 동안 원서 100권을 읽고, 토론하고, 학생들이 스스로 교육을 이끌어나가는 그 학교는 나에게 최상의 교육 공간으로 보였다. 그곳 아니면 안 될 것만 같았는데, 그때는 책 한 두 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리고 '안 된다' 하는 어른들 속에서 유일하게 희망을 주었던 것은 그곳에 간 경험을 적어낸 책들뿐이었고, 저자들이 토로하는 어려움과 극복의 과정을 나도 너무나 겪고 싶었다.


타협점으로 가게 된 고등학교는 특출난 것 없는, 집 근처의 고등학교였다. 나는 유난히 반항심이 많았고, 옳지 않은 교육이라고 생각되면 무조건 선생님에게 '따지러 가야겠다'고 마음 먹던 학생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실의 자리를 성적순으로 배치했다는 말을 들은 날에는 주임 선생님에게 바로 찾아가 눈물까지 흘리며 공부할 때에도 학생들은 성적 순으로 앉아야 하냐며 따졌다. 울 필요까진 없었는데 말하다보니 감정이 북받친 것 같다. ('따진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당시 나의 반항끼 섞인 말투는 의견을 제시한다기보다는 따진다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잘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기억은 한동안 나에게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가 우연히 만난 동창에게서, 그때의 내가 위로받을 만한 말을 듣고서야 부끄러움을 벗었다.


하루는 의미 없이 수학 문제 풀이를 하는 현실이 답답하여 야자 시간에 '내가 수학 문제를 풀지 않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거창한 에세이를 적어 내기도 했다. 당시 수학 선생님의 반응은 무반응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정말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었으니, 그리고 꽤나 모범적인 학생에 속했으니 별 관심을 안 가지신 게 아닐까 싶다. 한 번은 그때까지 취미로 하던 바이올린을 더 진지하게 해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매일 저녁 늦게까지 학원에서 연습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쉬지 않고 해왔던 것이 바이올린이었으니 전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가 강하게 반대해주신 덕분에 취미로 남았다. 그때는 누구보다 진지했지만, 반항심이 섞인 오기였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다가 정말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지금 열심히 공부하는 태도가 평생 간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였고, 현실과 타협하다가 나중에 환경을 탓하지 않기 위해 공부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때 가장 도움을 받은 것은 입시 수기를 모은 책들과 인터넷 강의였다. 입시 수기를 읽으면서 순공시간 타이머를 맞추거나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등 그들의 노력을 흉내 내보기도 하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면서는 그 어느 때보다 모든 것을 흡수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내 책상에는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동기부여를 해주는 말을 적은 메모지가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지수 함수의 기울기를 통해 하루 하루의 노력이 커다란 변화로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이끌어낸 수학 강의에서는 그 선생님을 향해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이 그렇게 간절해졌던 순간은 없었고, 나에게 인강은 유일하게 서울 학생들이 받는 교육과 같은 교육을 받게 해주는 매체였다. 문제 유형이나 트렌드가 빠르게 바뀌는 사회 분야 과목들은 내가 인강에서 들은 내용을 학교 선생님께 알려드리기도 했으니, 당시 내가 공교육에 가진 신뢰도는 사교육에 가진 신뢰도에 한참 못 미쳐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은 나에게 암흑기로 기억되는데, 그 이유는 외롭게 공부했던 기억 때문이다. 내 주변에 같이 공부하면서 자극을 받을 친구가 없다고 느꼈고, 전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그들을 막연히 떠올렸다. 수기로 읽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들과 공부하려면 학교에서는 혼자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나 자신을 더 외롭게 만든 것도 있는 듯하지만, 내신 접수가 끝난 당시 고등학교 분위기는 공부 자극을 받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남은 교실을 혼자 써도 된다고 하셨고, 나는 그곳에서 점심까지 싸다니면서 밥 먹는 시간을 아껴가며 인강을 들었다. 나는 그곳에서 마지막까지 수능을 준비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서 응원을 많이 받기도 했다. 특히 고3 담임선생님은 나와 비대면 면접 영상을 찍으면서 늦은 저녁까지 학교에 남으시기도 했고, 친구들은 한 번씩 구경하러 와 응원의 말을 남겨줬었다.


4. 대학교

비대면 수업으로 새내기 시절을 보낸 점이 한없이 아쉽긴 하지만, 캠퍼스 생활을 할 수 있을 때마다 신청해서 들어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가 신났던 순간들은 모여서 술 마실 때보다 좋은 수업을 들을 때였다. 난 전공 수업보다는 교양 수업에서 감동을 받았고, '인간의 역사와 미래의 인간'과 같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극시키는 수업을 좋아했다. 전공이었던 디자인 수업에서의 결과물보다 글쓰기 수업에서의 결과물이 더 뿌듯했고, 정치외교 수업에서 더 많은 전율을 느꼈다. 물론 디자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며, 전공을 하게 됐을 때부터 매년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나 타 대학교 졸업전시를 찾아가는 등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게 남은 빈칸은 '무엇을'이다. 목표 지향적이고, 납득할 수 있는 목적이 심히 중요한 나에게 있어서, 목적 없는 디자인 그 자체, 목적 없는 프로젝트 그 자체는 빈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정치 외교 수업은 나에게 '무엇을'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해주었다.


물론 '어떻게'를 갖추고 있어야 '무엇을'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나에게 디자인이 '어떻게'를 충족시켜주는가? 즉 나는 디자인을 잘하거나,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할 만큼 좋아하는가? (여기에서 말하는 디자인은 툴을 다루는 능력이나, 생각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내는 좁은 의미에서의 디자인을 말한다.)


밀라노 공대의 제품 서비스 시스템 디자인 과정을 한 학기 동안 교환 학생으로 겪어보면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얼추 나왔다. 나는 디자인을 잘하거나, 더 잘하고 싶을 만큼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디자인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디자인이 아닌 '어떻게'를 더 탐색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온 이후 졸업 전시를 준비하면서 인턴을 지원했다.


마케팅 에이전시 스타트업에서 인턴을 시작했고, 곧 세 달이 다 되어간다. 이곳에서 처음 회사 생활을 해보았고, 나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도 여러 번 주어졌다. 첫 인턴을 통해 배운 것은 다음 글로 적어볼 예정이지만, 여기에서는 짧은 감상을 적어보고자 한다. 나의 강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전략적 사고와 추진력이다. 최근 대표님과의 점심을 통해 내가 잘하는 것은 비즈니스가 성장하기 위한 전략을 고민하는 것과 그것들을 콘텐츠 마케팅이든, 세일즈 방법이든, 마케팅 캠페인이든 방법에 빠르게 녹여내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SNS를 통해 유효한 리드를 30건 이상 확보했고, 그 중에 하나가 중요한 거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SNS로 세일즈를 하는 것은 이전에 시도해보지 않은 방법이었고, 당시 내부에서도 회의적인 반응이었지만 나는 SNS가 가진 B2B 마케팅의 잠재력을 시험해보고자 했고, 그것이 눈에 띄는 성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SNS로 세일즈 되더라'라는 교훈으로 일축하고 싶지는 않다. 이 방식은 마케팅 에이전시의 브랜딩 일환의 여러 시도 중 하나였다. 인스타그램을 비롯한 온드 채널의 성장과 이를 통한 세일즈 리드 건 수집을 목표로 여러 가지를 시도했고, 수많은 시행착오 과정에서 생긴 감각으로 선택한 방법이 잘 통한 것이다. 브랜딩 프로젝트 일환으로 릴스 제작이나 블로그 발행 등을 해보면서 콘텐츠 마케팅이 생각보다 재밌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더 넓은 시각에서 반추해보니, 브랜드 전략 수립부터 이를 발현하는 과정에서 내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좋은 기회로 런던에서 인턴 경험을 하게 되었다. AI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인데, 지금은 소매업 분야에 AI 소프트웨어를 접목시키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인터뷰를 할 때 회사에서 원하는 것은 AI에게 러닝시키는 데이터의 옳고 그름을 판별하는 분석 작업임을 확인했는데, 나는 반복 작업보다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 지금 하고 있는 인턴 경험을 짧게 소개하고 마케팅 분야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마침 그곳에서 마케팅 부서를 신설했다고 하였고, 결과적으로는 마케팅과 데이터 분석 부서의 하이브리드형 인턴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사실 여기까지가 온천에서 10분여 남짓 동안 돌아본 나의 인생이다. 글을 적다보니 떠오르는 경험들이 하나 둘 더해져서 몸집이 커진 것 같지만. 지금 당장 내가 이 세상에서 잘할 수 있는 것이 비즈니스 전략을 세우고 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좋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니, 땀이 나기 시작해서 냉탕으로 몸을 옮겼다.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그고,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 아기에 시선이 멈췄다. 작고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다리를 참방대며 미소 짓는 모습을 한없이 쳐다보다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에 다다랐다. 나는 저 아기가 잘 자라기를 원한다, 저 아기가 살아갈 미래는 살 만한 세상인가?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미래 세대를 위해 현재 세대는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그러니 내가 '현재' 원하는 것과, '미래'의 세상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되기 시작했다. 감각으로 소통하고 무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지금 당장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것은? 지속가능한 에너지, AI? 내가 인터넷을 통해 좋은 교육을 경험했던 그때를 떠올린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AI는 불가피한 변화이다. 나 또한 그 시대적 변화의 흐름에 탑승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분야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만큼 올바르게 쓰일 필요가 있는 분야이다. 여기에서 정부 규제 등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상화'이고, '보편화'이다. 질 높은 교육, 예술, 최첨단 기술 이 모든 것이 누구든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러니 이 모든 것을 그 어떤 환경에 처한 소수들도 동일하게, 적어도 최소한의 수준으로는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렇다면 '무엇을'에 들어갈 키워드가 보이기 시작한다. 미래와 관련된 무언가이다. 난 습식 사우나로 몸을 옮겨 뜨거운 증기를 들이마시고 내쉬며 생각을 이어갔다. '더 나은 미래'.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것이다. 저 귀여운 아기가 살아갈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더 나은 미래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을 일상화하는 것이다. 발현되는 방식은 예술이 됐든, 교육이 됐든 무궁무진할 것이다. 이미 문화가 기술의 힘을 빌렸을 때 얼만큼의 파급력을 가지는지는 모두가 느끼고 있지 않은가. 인터넷을 통해 지구 건너편의 DJ가 송출하는 음악을 실시간으로 듣고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예술가들은 전세계에 팬층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문화와 예술에 대한 나의 선호도는 언젠가 발현되겠으나, 그 전까지는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테크 산업에서 기술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러니, 앞으로 내 선택의 강력한 기준은 이것이 되려나?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인가?

미래를 향해 가는 산업의 방향키를 조정하는 일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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