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3.27~3.29
폴란드 그다인스크는 교환학생 시절 사귄 친구들을 보러 두 번 방문했었다. 매번 정말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서 이번에도 시간을 맞춰 친구들을 보러 가기로 했다. 세 번째 방문인 그다인스크와 처음으로 가는 바르샤바!
금요일은 인턴 일이 없어서 목요일 저녁에 M과 라이언에어를 타고 갔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잠이 쏟아졌던 교환학생 시절과 다르게 영 잠이 오지 않아 지루한 2시간을 버텨야 했다. M과 다른 좌석에 앉아 있어서 난 앨범을 보다가 여러 사진을 M에게 보내며 'Beast or bum?' 질문을 와다다 보내두었다. 그다인스크에 도착하자마자 M은 내게 'Did you lose yourself?'라는 코멘트를 남겼다. 잠이 안 오는 2시간 가량의 비행 시간이 그렇게 지루한 것인지 몰랐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그다인스크 도심에 도착! 내 친구 N과 C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내려서 조금 기다리니 멀리에서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그다인스크의 밤 거리를 걸으며 N와 C의 집으로 향했다.
N과 C 둘은 그다인스크에 함께 살 집을 얻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겉에서만 보던 그다인스크의 건물, 그 중에서도 꼭대기층이었다. 높은 천장이며, 햇빛이 쏟아질 듯 들어올 창문이며, 모든 것이 아름다운 집이었다. N은 돈이 더 들더라도 너무 마음에 드는 집이라 골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 밤에는 N이 미리 끓여둔 수프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N이 해주는 폴란드 음식은 처음이었는데 무얼 넣었냐고 물어보니, 그냥 이런저런 채소를 갈아서 끓였다고 한다. 국물을 좋아하는 한국인으로서 유럽에서 수프를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나와 M은 따뜻한 환대가 담긴 수프를 마시듯 먹고 (M은 두 그릇이나 먹었다)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은 N과 C가 함께 차려준 폴란드식 식사였다. 이전에도 비슷하게 먹어본 적이 있어서 나는 바로 빵을 갈라 치즈와 잼 등을 넣고 먹었다.
M은 성대한(?) 아침식사에 놀라며 크리스마스 아침 같다면서 맛있게 먹었다. 나는 내가 차린 것도 아닌데 내 친구가 뿌듯해 배도 마음도 불렀다. 그리곤 내가 런던 한인마트에서 사온 빈츠를 나눠먹었다. 그리고 차를 마셨다. 차를 사랑하는 C 덕분에 난 다양한 찻잎 컬렉션에서 내가 원하는 맛으로 골라 마실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롭게 아침을 시작한 뒤 화창한 날씨를 즐기러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에 그다인스크 거리를 걸으니 익숙한 풍경이 또 새삼 달라 보이고, 새롭게 보이는 것들도 있었다. 겨울에 한 번, 여름에 한 번, 그리고 이번에는 봄의 그다인스크라니! 내가 폴란드에 여행올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이렇게 세 번이나 방문할 줄은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린 이렇게 세 겹의 추억을 쌓고 있었다. 또 M에겐 폴란드가 처음이었고, 그에게 의미 있는 여행이 되기를 바랐다.
Z까지 합류한 후에 우린 St. Mary's Basilica로 향했다. 내가 좋아했던 하얀 천장 기둥. 곳곳에 있는 청동 혹은 목조 장식품과 조각상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린 거대한 시계와 화려한 기품을 뽐내는 오르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곤 대성당 꼭대기 층으로! 굉장히 저렴한 티켓을 사면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지나 그다인스크의 도시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지붕까지 올라갈 수 있다. 따가운 햇빛 아래에서 우린 사진도 찍고, 지도를 보며 어떤 건물이 어디에 있는지 맞추기도 하며 잠시 그다인스크의 하늘과 가까이 있었다.
이후 카페로 향했는데 나는 가는 길에 아주 작은 그다인스크의 건물 마그넷을 샀다. 원래 기념품으로 마그넷은 커녕 엽서도 잘 사지 않고 있었는데, 그다인스크의 건물은 내가 들어가봤고(드디어!) 세 번째나 온 곳이니 하나 사고 싶었다.
카페는 Józef K.이라는 곳이었는데 내부 디자인이 독특한 매력을 가진 곳이었다. 마치 엄청난 수집가의 집에 들어온 기분! 나는 연신 이곳 저곳 사진을 찍어대며 그 안의 독특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기억할 수 있길 바랐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밖으로 나가 천천히 전쟁 박물관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Artus Court(Restored 14th-century former merchant's meeting house) 앞에서 군대 행진을 하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해군으로 보이는 군인들이 군악대와 행진을 준비하고 있었고, 우린 잠시 기다려 그들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다인스크를 빼앗겼다가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였다. 꽤나 오랫동안 행사를 보다가 또 다른 친구 B가 곧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 기념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본 B는 무려 피어싱을 하고 왔다! 그다인스크에서는 남자들이 귀 한쪽에 피어싱을 하는 것이 꽤나 흔한 일로 보였다. 거기에 수염까지 기르고 온 B에게 나는 '새로운 너에게 적응할 시간을 좀 줘ㅋㅋ'라고 해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그날 오전에 피어싱을 하고 온 거였으니, 내 반응보다는 '잘 어울린다'는 반응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그래도 솔직한 게 좋겠지..?) 전쟁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에 우리의 밀라노를 떠올리는 아이스크림도 먹어주었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이 피스타치오!
난 그 전쟁 박물관이 두 번째였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박물관을 즐길 수 있었다. M의 공이 컸는데, 우리 중에서 가장 제2차 세계대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시 내내 우리 중에서 가장 신이 나 보였다. 처음 방문했기도 해서 더 재밌었을 것이다.) 또 C의 추천 덕분에 어린이 전시실임에도 전쟁 이전 - 전쟁 중 - 전쟁 이후에 평화로웠던 가족의 집안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생생하게 보여주는 전시를 볼 수 있었다.
난 저번 방문 때보다 더 많은 디테일에 공을 들인 박물관임을 알 수 있었다. 모형 하나 하나가 굉장히 섬세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을 M의 시선이 아니었다면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은 미국의 총기 규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이에 대해 M이 흥미로운 의견을 가지고 있어서 우린 그가 마치 도슨트인 듯 잠시 멈춰서서 경청해야 했다. 그 모습이 참 웃겨 난 사진을 찍었다.
이전에 왔을 때에는 전쟁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자세한 것까지 전시하는 게 불편했는데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히틀러는 어떻게 파시즘을 성공시켰는지, 이데올로기를 주입받은 어린 아이의 인생은 어떠한지 고민하며 관람할 수 있었다. 전쟁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딱 하나, 전쟁과 그로 인한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함이다.
조금씩 어둑어둑해지는 거리를 구경하며 우린 폴란드식 만두, 피에로기를 먹으러 갔다.
나는 수프도 시켜서 먹었는데 맛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처음 폴란드에서 만두를 먹었을 때는 만두가 유럽에도 있다는 걸 알고 정말 놀랐던 기억이 있었다. 난 만두가 동아시아에만 있는 음식인 줄 알았다. 그러니 여행은 음식으로도 우리의 시야를 확장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피아니스트가 직접 연주했을) 피아노 연주 소리를 배경 삼아 우린 배에 피에로기를 하나 둘 채워넣었다.
하루를 일찍 마무리할까 고민했지만, 그래도 다음 날 오전보다는 그 날 밤에 Sopot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약간은 피곤했지만 기차를 타러 갔다. 기차역에서는 술에 절어 고함을 질러 대는 아저씨를 만났는데 친구들 말로는 응원하는 축구 팀이 진 것에 대해 욕을 하는 거라고 했다. M은 그 아저씨가 우리를 따라 자리를 슬쩍 옮기는 게 너무 웃기다고 했다. 난 혼자였으면 무서웠을 텐데 여럿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B는 다음 날 만나기로 하고, 우린 이미 어두워진 SOPOT에 도착했다.
내가 SOPOT을 정말 좋아했던 건 해가 떠 있을 때였단 걸 그때 알았다. 더 아름다운 SOPOT을 M이 봤으면 했는데 그저 깜깜한 밤 바다를 보게 되어 조금 아쉬웠다. 그렇지만 곰 병사 동상도 보고, 작은 난쟁이 동상도 보고, M이 공중에서 몇 번 도는지 해보겠다면 뛰었다가 약간 넘어지는 광경도 보았으니 되었다! 반사되는 불빛만이 보이는 밤 바다를 보면서 N은 우주보다 해저 세계가 더 무섭다고 했다. 인간이 파악한 해저 세계는 얼마 되지 않으니 얼마나 거대할까. 난 더 신기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끝이 안 보이는 바다를 쳐다보고 있자니 약간의 무서움이 밀려오긴 했다.
그날 집에 돌아가서 난 사과 테이스팅을 했다. 내가 매일 사과를 먹는 걸 알고 N이 여러 가지 사과를 미리 준비해둔 것이다! 거기에다 내가 추천한 대로 땅콩 버터와 종종 먹는다고 했다. 난 감동을 받아 꼼꼼히 테이스팅을 실시했다. 적어도 여섯 가지는 넘는 사과를 조금씩 맛보며 난 3점부터 9점까지 냉철한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9점을 받은 사과는 다음 날 내 아침 식사가 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 와중에 M과 C는 그다인스크 버거 집에서 버거를 사와 먹었는데 C가 사온 '김치 버거'를 조금 맛보니 꽤나 맛있었다! 매번 느끼지만 N과 C는 정말 사려가 깊은 친구들이다. 이들을 만나 참 감사하다고 생각하며 그다인스크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전날 미리 사둔 기차표를 챙기고 입에는 사과와 땅콩버터를 욱여넣으며 빠르게 기차역으로 향했다. 시간 넉넉히 나왔는데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걸음을 빨리했다. N 대신 C가 기차역까지 바래다줬는데 기차를 기다리면서 C와 C의 형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의 형제 자매를 알게될 때 그 사람이 다시 보이는 건 왜일까? 그 사람의 세계가 넓어보여서일까?
아침 일찍 서두르는 N과는 집에서 아쉬운 작별의 포옹을 나누고, C와도 작별 인사를 하며 매번 그러하듯 다음을 기약했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세 번이나 그다인스크에서 만났으니 또 하나의 다음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기대로! 13살의 내가 알기나 했겠는가, 폴란드인들과 내가 친구가 되어 정을 나누게 될 줄은..
기차에는 B가 미리 타고 있었다. 나와 M은 여행 중이니 편하게 가자는 마음으로 일등석을 예매했지만, B는 이등석을 예매해서 사람이 올 때까지만 잠시 옆자리에 앉아 있기로 했다. (그렇게 쭉 갔지만ㅎㅎ) 바르샤바까지는 2~3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옆 창문으로 들어오는 그다인스크의 풍경을 구경하며, 나는 링크드인에 적을 글을 편집했다.
M과 B는 로마가 얼마나 위대한 국가였는지에 대해, 무엇이 로마를 위대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둘이 대화가 잘 통할 줄은 이미 알았다. 나중에 생각난 것인데, 두 번째로 그다인스크에 친구들과 놀러갔을 때, 호박 박물관에서 B는 하루에 한 번씩 로마를 생각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마 M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마를 동경하는 둘의 대화에 나는 끼어들었고, 조금 시간이 지나 우린 영국 왕실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치적 역할보다는 문화로서 영국인들의 자부심이 되고, 관광객들에게는 관광 코스가 되는 영국 왕실. 얘기하다보니 이런 질문도 떠올랐다. 문화가 지속되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화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나와 B는 결국 타협하지는 못했지만,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린 언제나 그렇듯이 서로의 의견을 받아들이며 기차에서 내렸다.
우선 에어비앤비에 짐을 두고 오기로 하여 내가 앞장서서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몇 시간 전부터 연락이 안 되던 호스트가 아예 연락이 두절된 것이다. 숙소 건물 바로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나는 우선 근처의 다른 곳으로 급하게 예약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나는 B가 우리에게 바르샤바를 소개시켜주려고 멀리까지 시간내서 와줬는데 그렇게 시간이 쓰이는 게 너무 아깝고 미안했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에게도 화가 나고, 시간을 제대로 못 쓰는 것 같아 속이 상하고, 배낭은 무거워 어깨는 아프고, 여러모로 바르샤바와의 첫 만남이 쉽지만은 않았다. 거기에다가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의 줄은 어찌나 길던지. 그 상황에서 계획을 바꾸기에는 나의 뇌 용량에 과부하가 올 것 같아 그냥 기다리기로 했다. 줄이 길면 맛있겠지! 이렇게 된 김에 셋이 대화라도 많이 하면 될 거라 생각하며.
점심은 Manekin이라는 크레페 식당에서 먹었는데 sweet crepes와 savour crepes가 있었다. savour crepes는 다양한 필링이 들어있는 형태였고 소스가 곁들여져 나왔다. 나는 그때 케밥이 무척이나 먹고 싶은 상태여서 케밥 크레페를 시켰는데 정~~말 맛있었다. 맛이 없을 수 없는 맛이었다. 우린 일본 여행에 갔다 온 얘기를 하고, 또 한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곁들였다. 당시에는 속이 많이 상했던 기억이지만, 그 기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는 점과, 그럼으로써 그 기억에서 상처는 덜어내고, 그저 그런 이야깃거리로 만들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물론 내게 그렇게 유쾌한 주제는 아니다.)
새로 예약한 에어비앤비에 도착하니 B가 떠날 시간이었다. B가 바르샤바에서 한 거라곤, 에어비앤비로 걸어가기, 식당에서 줄 서서 기다리기, 점심 먹기, 다른 에어비앤비로 가기였다. 같이 가자고 한 사람으로서 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게 여행이고 인생인데 어쩌겠는가! 적어도 나중에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3시간 동안 기차 타고 바르샤바에 왔는데 점심만 겨우 먹고 온종일 걷다가 집에 갔어!" 여행을 통해 배우는 것은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그것도 결국엔 하나의 에피소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는 습관이다. 가장 기억에 안 남는 여행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술술 풀리는 여행이다. 고마움과 미안함을 담아 B와 작별을 했다.
바르샤바에서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