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일본이었다.
두 번째 이야기.
그곳에는 사슴공원도 있어서 J는 사슴을 본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나는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며칠 전 L과 나눈 대화의 충격이 사그라들면서, 그러나 내가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혼란스러움만 증폭되고 있다. 그러므로 내 옆에 있는 L과 대화를 나눌 수가 없고, 그에게 물어봐야 하는 질문들을 정리하다가 포기하고, 그날 나누었던 대화를 다시 분석해보지만 또다시 포기하고 있다. 나의 기분을 살피는 친구들은 몇 번이고 괜찮냐고 걱정스레 물어본다. 기분을 들켜 괜히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피곤할 뿐이라고 둘러대지만 내 신경은 온통 그날의 대화에 머물러 있다.
계속 걸어다닌다. 걷는 것에 지치는 것인지, 내 생각에 지치는 것인지 한없이 앉고만 싶다. 내게 필요한 것은 5천 원 정도로 살 수 있는 시원한 음료와 조용한 공간이라는 것을 알지만 단독 행동을 하고 싶지는 않다. 기분이 사그라들기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마음 속으로 L을 째려본다. 쓸데 없는 짓이다. 며칠 전에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많은 감정이 들어 핸드폰 메모장에 모든 감정을 나열해봤다. 어이없음, 실망, 연민, 체념, 다행스러움, 놀람, 당황, 황당, 후련함, 혼란스러움, 대견함, 배신감. 배신감은 나중에 화가 잔뜩 난 채로 추가했던 단어다. 원래 감정을 이해하면 마음이 사그라들던데, 이번에는 더욱 혼란스럽기만 하다. 동시에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불변의 목표를 상기시키지만 쉽지 않다.
B는 무언가 낌새를 알아차리고 내게 몇 번이고 괜찮냐고 물어본다. 전혀 괜찮지 않다. L과 주고 받는 침묵이 너무 어색하여, 이 자리를 피하고만 싶다. 사슴이 귀엽고, 똥 냄새가 심하고, 간식을 주려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B의 뒤뚱거림이 웃긴 이 모든 상황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간다. 딴 세상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상황에 맞게 표정을 지어보지만, 어색한 웃음으로 보였을 테지. O는? 나중에 가서야 O가 중요한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때만 해도 몰랐다. O보다는 'O와 L'에게서 느꼈던 질투의 감정은 기억이 난다.
질투. 느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질투를 낸다. 이것이 나의 탓은 아니다. L의 불필요한 친절과 의도를 읽기 어려운 행동이 내가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원하지 않는 감정을 느끼게끔 한다. 이것을 L의 '잘못'으로 돌릴 수 있을까? 아니다. 따라서 나의 과대 망상하는 습관으로 탓을 돌린다. 이 모두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곤욕이지만, 적어도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시선을 잠시 돌려준다.
나라시는 평화로웠고 (내 마음은 시끄러웠고),
풍경은 기적스러운 햇빛과 이를 받아 빛나는 나뭇잎 덕분에 아름다웠고 (내 표정은 그러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친절하였다 (나는 너에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철저히 혼자이고 싶었다,
그렇지만 발 맞춰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여행 끝에, 더 이상 순수하고, 특별한 너는 없다.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슬프다, 너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 모든 게 부질없고, 쓸모 없는 것으로, 실수로 느껴진다. L한테 말해주고 싶은 건, 앞으로 널 이전처럼 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절대.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도 이 상처에서 결국 다시 일어날 것이고, 거기에 너는 필요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