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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재민 Nov 25. 2023

폐지 몇 장에 달린 생존

옆 집 할머니는 추운 날 새벽부터 집 밖으로 나오신다. 빨리 폐지를 모으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누가 봐도 낡은 옷 위에 머플러 하나를 걸쳐서 겨우 바람 구멍을 막고 있다. 분명 저걸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익숙하다는 듯이 장갑을 끼고 리어카를 끈다.


얼마 전 폐지 값이 반토막 나면서 폐지 줍는 노인들의 삶이 더욱 팍팍해졌다. 때 되면 폐지를 모아다 주는 상인들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폐지수거 노인들의 삶이 팍팍해진 것을 두고 보자니 가슴이 먹먹하다.


사회구조적으로 폐지수거 산업은 제지 회사가 큰 이득을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지회사는 인건비를 들이지 않고 노인들(영세자영업자)을 통해 상품포장의 원료를 재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제지회사와 같은 초강자가 약자를 수탈할 때는 국가가 적극 개입해 중재해야 한다. 그게 헌법 정신이다. 헌법은 그 약자들이 시장으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시민임을 확실히 명시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헌법 정신은 보란 듯이 짓밟히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4조 5항 신체장애자 및 질병ㆍ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이러한 추락은 폐지 줍는 노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정부수립 이래로 특권층이 전례 없는 부와 권세를 누릴동안, 우리 사회의 산업화를 위해 헌신해왔던 노인의 삶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우리 사회의 노후소득보장 지출이 최근 5년간 연평균 10%씩 증가했으나, 노인빈곤율은 38.9%로 여전히 OECD 최고 수준이다.


보수 정객들은 ‘개인의 노력과 선택’이 빈곤의 원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대체로 빈곤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노인들이 빈곤해진 가장 큰 이유는 사회적 자본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오랜 기간에 걸쳐 개인 간 연대 · 신뢰가 해체되어 왔다.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면, 복지제도에 대한 지지율이 낮아지고, 복지제도 대신 의존할 수 있는 사적인 협력관계도 사라진다. 이는 자연스레 취약계층의 증가로 나타난다. 그라고 그 취약계층 대부분이 바로 노인층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노인을 위한 소득보장제도를 통합, 확대시켜 나가는 것 뿐이다. 한창 일할 시기에 국민연금에도 들지 못한 노인인구가 많다. 이들의 노후소득은 기초연금 30만 원에 의지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노인들의 기본적인 생존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가 포괄적으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 기초연금대상 확대와 기초연금 증액이 그 방안이 될 수 있겠다.


얼마 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기초연금을 월 40만 원으로 증액하고,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핵심 의제로 내걸었다. 윤석열 정부는 기존 지급 대상(노인의 70%)을 유지한 채, 월 최대 40만 원으로 증액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민주당이 기초연금 의제를 본격 제기하면, 정부도 고령 유권자층의 표심을 고려해 나름의 대응책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다.


노인들은 우리의 산업화를 위해 헌신해왔다. 그러한 노인들에게는 지혜가 있다. 노인을 버리는 사회는 지혜도 함께 잃을 것이다. 사회가 조금만 예산을 모은다면, 노인빈곤타파는 불가능하지 않다. 지금 관망했다가는, 언젠가 우리 자신이 폐지를 찾기 위해 여러 가게를 찾아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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