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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재민 Jan 08. 2025

자유주의 심장부에 핀 붉은 꽃

자유주의의 본산에서 사회주의정당이 빚어낸 역사의 아이러니

영국, 자유주의경제사상의 발상지이자 오랜 의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그런 영국에서 사회주의 색채를 띄는 정당, 노동당이 여러 차례 집권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단단한 바위틈을 뚫고 붉은 장미꽃이 피어난 모습이랄까. 영국노동당은 자유주의의 중심지인 서구사회에서 진보적가치와 정책이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구현될 수 있는지를 제시해왔다. 이 글에서는 영국 노동당의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역사를 찬찬히 짚어보며, 그들이 어떻게 권력을 잡았고, 영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내부에선 어떤 이념적 갈등과 변화를 겪어왔는지, 유심히 들여다볼 것이다. 

영국의회 개원식


‘노동자의 울부짖음’에서 출발…애틀리 시대, 복지국가 초석을 놓다


19세기 후반, 산업혁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영국 사회는 극심한 계급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의 정치 지형은 보수당과 자유당이 양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급증하는 노동자 계층의 절박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00년, 노동조합과 페이비언협회 등 사회주의적 색채를 가진 단체들이 손을 잡고 노동대표위원회를 만들었고, 이것이 노동당으로 발전하게 된다. 초기 노동당은 의회 내 소수정당으로서, 제도권 안에서 노동자계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주력했다. 노동당은 1918년 당헌을 개정하여 사회주의강령을 명문화했다. 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적 이상을 현실로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을 것이다. 1924년 램지 맥도널드가 이끄는 첫 노동당 정부가 탄생했지만, 안타깝게도 소수정당이였기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

노동당의 눈에 띄는 행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가 이끈 1945년 정부의 등장이후부터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영국사회는 근본적인 변화를 갈망했고, 애틀리 정부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대담한 정책들을 쏟아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유명한 슬로건이 상징하는 복지국가의 뼈대를 세운 것이다. 특히, 국민보건서비스의 설립은 모든 국민에게 무상의료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의료접근성을 개선했고, 국민 건강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국민보건서비스가 시장중심의 의료시스템이 아닌, 국가가 보편적 복지를 책임지는, 즉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또한, 철도, 석탄, 전기 등 주요기간산업을 국유화하여 국가의 경제개입을 확대하고 공공성을 강화한 것 역시, 이권추구보다는 공익을 우선시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의 원칙을 따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실업, 질병, 노령 등에 대한 사회 보험 제도를 확대하여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짠 것 또한,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의 책임을 반영한 정책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전후사회의 불안 속에서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얻었고, 노동당이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당내 좌우갈등과 ‘제3의 길’…끊임없는 변신으로 살아남다 


이후 노동당은 보수당과 번갈아 가며 영국정치권의 두 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1970년대 경제위기와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정부가 등장하면서, 노동당은 전통적인 사회주의노선만으로는 더 이상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당 내부에서는 좌파와 우파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기존의 사회주의 노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옹호하는 우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통적인 국유화와 복지확대중심의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

마가렛 대처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0년대 토니 블레어는 “제3의 길”이라는 새로운 노선을 들고 나와 노동당을 중도좌파정당으로 탈바꿈시킨다. 시장경제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사회정의와 복지를 강조하는 이 노선은 전통적인 노동계급뿐 아니라 중산층의 표심까지 얻으며 노동당의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제3의 길”은 시장중심의 경제체제를 받아들이고, 복지정책의 상당부분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념적 순수성을 일부 희생했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타국 사회주의정당과의 비교

토니 블레어

토니 블레어 이후 노동당은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2010년 이후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었고, 브렉시트와 스코틀랜드 독립 문제 등 새로운 정치적 난제들에 직면했다. 제러미 코빈 체제에서는 다시 전통적인 사회주의노선으로의 회귀를 시도했지만,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 데는 실패했다. 현재 키어 스타머 대표는 다시 중도노선을 택하며 당의 재건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노동당이 여전히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명확히 확립하지 못하고 있으며,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영국 노동당, 다른 나라 사회주의정당들과 무엇이 다를까


영국노동당의 역사를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정당들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차이점을 발견한다. 독일사회민주당은 탄탄한 이론적 토대를 가지고 노동조합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영국노동당은 다소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하며, 특정 계급에만 갇힌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왔다. 프랑스사회당은 이념적으로는 좀 더 좌파적인 경향을 보이며, 당 내부의 이념적 스펙트럼 또한 넓은 편이다. 그러나 영국노동당은 상대적으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북유럽국가들의 사회민주주의정당들은 높은 수준의 복지국가를 성공적으로 건설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영국노동당 역시 복지국가건설에 큰 역할을 했지만, 북유럽국가들만큼 사회전반의 폭넓은 사회민주주의적 합의를 이루지는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비교분석을 통해 영국노동당의 특징과 한계를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변화만이 답일까…진보정치의 미래는 어디로 


영국 노동당이 걸어온 길은 진보정당이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고 유연하게 변모함으로써 어떻게 성공의 역사를 써 내려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만하다. 계급갈등의 해소, 복지국가의 건설, 시대의 변화에 발맞춘 전략의 수정, 이 모든 것이 노동당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당 내부의 이념적 충돌을 슬기롭게 넘어서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노선을 제시함으로써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것은 곱씹어볼 만한 대목이다. 하지만, ‘제3의 길’에서 드러났듯이, 대중적 인기를 얻기 위한 변신이 자칫 당의 뿌리를 건드리는 변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키어 스타머 총리

현대의 진보정당들은 영국 노동당의 역사에서 나아갈 길을 찾곤 한다. 특히 민주적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 즉 경제적 평등, 사회적 연대, 그리고 민주주의를 복잡다단한 사회에 맞춰 재해석하고 현실정치의 영역에서 구현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앞으로도 영국노동당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도전에 직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도전에 맞서 싸우면서 진보정치, 특히 민주적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영국노동당의 행보와 역사는 전 세계의 진보정당에게 제시될 이정표가 될 것이다.





* 참고자료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오세영, [영국 복지국가 연구]

-에스핑-안데르센, [자본주의의 세 가지 세계]

-박진화, [사회복지역사]

-유범상, [사회복지발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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