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를 미덕으로 여기는 최초의 청년세대

신자유주의사회에서 성공신화는 청년세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

by 백재민 작가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서점에가면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러코너를 장악하다시피 하고, 유튜브에서는 억대연봉자들의 '하루루틴'이 수십만조회수를 찍는다. 그들의 아침식단부터 잠들기 전 명상까지, 성공하는 삶의 레시피를 따라하려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상한 일이다. 불과 십여년전만 해도 청년세대는 권위에 저항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그 권위있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자신을 한없이 몰아붙인다.


논지를 전개하기에 앞서 한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나를 포함한 청년세대가 품고있는 성취욕과 성실의 미덕이 부정되길 바라는게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자기성장과 직업인으로서의 성취를 바라는 마음, 성실함을 중시하는 태도, 하루하루를 꾸준히 살아내려는 부지런함은 개인의 존엄과 자기완성에 닿는 주요동력이다. 또한 그러한 성실과 성취욕과 같은 (배타적이지 않다는 전제하에) 건설적인 욕구는 사회공동선을 형성하는 주요동력이기도하다.


이글에서 문제시하는 것은 그 가치들이 신자유주의시스템에서 지나친 경쟁과 비교의 맥락에서 평가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취욕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욕구들이 사회공동선과 연계될 수 있음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말인즉 개인의 성취가 곧 사회의 안전망과 상호간의 존중으로 환원되는 공감대를 형성할 때, 경쟁사회에서의 열정과 성실함은 배타적이라기보다 포용적이라는 인식을 형성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병철 교수

한병철 교수는 오늘날의 현상을 두고 여러저서에서 차례로 언급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시스템안에서 우리는 권위나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대신 자기자신 내면에 효율을 내제해왔다. 즉, 문제는 밖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를 억압하는 독재자도, 착취하는 자본가도 가시권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우리내면에 그들이 들어와있다. 새벽다섯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출근전에 영어공부를 하고, 퇴근후에는 부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누가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를 쥐어짜는 모습은 어딘가, 과해보이기 까지한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며 우리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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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대한민국에서 출생하여 독일에서 학술활동을 전개하는 철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이다. 그의 학문적 배경은 독특하여, 고려대학교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한 후 독일로 건너가 브라이스가우의 프라이부르크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철학, 독일문학, 가톨릭신학 등을 수학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우리는 이런 일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주말에도 자격증 공부를 하고, 휴가중에도 업무메일을 확인한다. 저녁약속을 잡으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친구와의 대화중에도 이 시간에 강의 하나라도 더 들을걸 하는 후회가 스친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강요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살아간다. 문제는 이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멈추는 순간 뒤처질 것 같고, 뒤처지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은 공포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이 공포는 어디서 온 것일까?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은 성공한 사람들의 사례와 통계를 종합해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조건을 탐구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골자는 어떤국가에서 태어나는가, 어떤부모를 만나는가에 따라 성공여부가 판가름난다는 것이다. 자신이 받을 교육의 질, 사회생활에서의 네트워크, 심지어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안전망의 유무까지 결정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같은 성실이라도 서로 다른조건에서 발휘되는 능력과 상이하게 주어지는 기회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한다. 조건의 차이를 인식할 때, 성실함은 공정한 기회를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공정한 출발선을 만들기위한 요구와 개인의 노력은 서로를 보완해야 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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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부르디외

20세기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 그리고 참여지식인이다. 카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의 고전사회학적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혁신적으로 결합하여, 사회불평등이 어떻게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되는지를 깊이 탐구했다. 그의 이론은 구조주의와 행위주의의 대립을 능가하는'실천이론'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사회는 부모님의 계층적 기반이 자녀에게 끼치는 물질적인 유복유무로 치부하고 마는 경향을 이어왔다. 그러나 돈의 문제만은 아닌듯하다. 명문대교수의 자녀는 '공부하는법'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의사집안의 아이는 의대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 어릴 때부터 간접경험한다. 이것이 부르디외가 말한 속한계급(계층)에 따라 내면화된 성향과 태도의 체계라 생각한다.


주목할만한 점은 또 있다. 바로 국가단위의 불평등이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상교육과 의료,실업 시 재교육프로그램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진로를 다시 모색할 수 있다. 반면 사하라 이남아프리카의 많은국가에서는 기본적인 식수와 초등교육조차 보장되지 않는다.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의 주장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글로벌소득불평등의 80% 이상이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어느국가에서 태어났는가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연소득이 방글라데시 평균소득의 수십배에 달하는 현실이다.

브랑코 밀라노비치(호랑코말코가 떠오르는건 나뿐인가...또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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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랑코 밀라노비치

브랑코 밀라노비치. 세르비아계 미국인 경제학자로, 특히 글로벌불평등과 소득분배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석학. 약 20년간 세계은행연구소의 수석경제학자로 활동하며 방대한 국제가계소득데이터를 축적하고 분석했으며, 현재는 뉴욕시립대학교 대학원의 객원석좌교수이자 룩셈부르크 소득연구센터의 선임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 불평등을 엘리트계층의 성공신화로 덮어왔다. 성공한 사람들, 즉 엘리트계층의 개인서사는 언제나 개인의 의지와 노력을 강조하며 모두에게 성장할 수 있을거라는 말을 세련된 경제용어와 자기계발담론으로 말해왔다. "저도 어려운환경에서 시작했습니다"라는 고백이 우리 귀에 익을 정도로 성공서사의 시작레파토리로서 자리매김해온 사실이 이를 잘 드러낸다. 그 '어려운 환경'이 여전히 특정계층내부의 상대적 인식일 뿐이라는 사실은 언급되지 않는다. 중산층가정에서 태어나 고액의 등록금을 내야하는 학원을 다니며 실패해도 다시도전할 수 있었던 사람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벌며 한번의 실패가 모든것을 무너뜨리는 사람사이의 차이는 '노력의 양'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러니까 부유한 국가에서 태어나도 부모님을 잘못만나면, 상대적 빈곤에 치여 더욱 불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 역시 다른 또래처럼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그것은 그것인 것이고, "객관적인 데이터와 현실은 직시하고 살아야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사회의 계층구조화는 과거의 지배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군사정권시절에는 권력이 총칼로 사람들을 억눌렀다. 그 폭력은 가시권에 들어올 정도로 명확했고, 그래서 북받쳐오르는 저항의지도, 그 저항의 방향도 명확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고, 함께싸웠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는 모두 소유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충성스런노예가 되고자 한다. 그 가운데 친척도 믿지못할 정도로 파편화한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모두가 똑같고 모두가 고립되어 있다. 더 이상 함께 싸울대상도, 함께 싸울동지도 없다. 나만 성공하면 되는 사회가 펼쳐진 것이다.


그런 사회에서 각개인의 고립은 불평등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명문대생은 자신이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그 자리에 왔다고 믿는다. 그 과정에서 받았던 고액과외, 부모의 정보력, 실패해도 재도전할 수 있었던 경제적 여유는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비정규직청년은 자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그 자리에 있다고 체념한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불리한 조건들, 학벌과 인적네트워크의 부재는 보이지 않고, 그러한 조건아래에서 사회는 무기력한 개인이 게으른인간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진보의 인기가 시들해진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진보는 줄곧 외부의적과 싸워왔다. 불평등, 부당한권력, 사람보다 이윤이 먼저인 자본이 그대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내또래는 그 대상의 충실한 개로 살길바라면서 그 구조의 충실한 개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사회문제를 운운하는 일은 남탓"이고, "그 남탓하는 정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라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자신의 삶을 진정과 성실로 채우는 일은 더없이 보기좋고, 권장되어야 할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다. 청소년, 청년자살률이 이를 증거하고 있지않나. 이 사회에서 하루에도 수십번 멘탈크러시와 자살충동을 겪는 청년이 어쩌다가 한둘이었다면, 이런 주제의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런상황에서 진보가 아무리 "당신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외쳐봤자, 이들은 "피해의식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저는 제 미래에 투자하고 있을 뿐입니다"라고 답한다.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핵심에는 '공정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있는듯하다. 우리는 모두가 일률적으로 같은시험을 보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그 시험을 준비하는 조건이 다르다고 인식하는 것을 불순하게 생각한다. 조건의 격차를 이야기하는 일은 곧 노력도 하지 않고서 부모님탓, 사회탓을 하는 것과 동급으로 여겨져왔다. 이는 사회의 자정능력이 엘리트계층의 입맛에 맞게 조율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같은 현상은 능력주의가 왜곡된 사회에서 종종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능력주의는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겉보기에 공정한시스템이 실은 더 잔인한 계급고착화를 만든다. 왜그런가하면 성공한 사람에게는 "나는 당연히 받을자격이 있다"는 오만을, 실패한 사람에게는 "내가 무능해서"라는 자기혐오를 심어주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마이클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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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영

영국의 사회학자. 사회운동가이자 정치인이기도. 20세기후반 영국사회개혁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용어를 창안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런던정경대에서 수학했고, 영국노동당의 주요인사로서 교육개혁을 선도하는 등 실천적인 학문활동을 전개해왔다.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2030세대의목소리를 들어보자. 공정해야한다. 능력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게 당연하다. 노력하지 않고 혜택만 바라는 건 부당하다.는 말에 반박하기는 쉽지않다. 능력에 따른 보상, 노력에 대한 인정은 직관적으로 공정해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몇가지 전제가있다. 능력이 모든사람에게 공정하게 측정된다는 전제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능력을 측정하는 잣대자체가 이미 특정계층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어있다. 명문대입시를 예로 들어보자. 학생부종합전형은 스펙이 아닌 잠재력을 본다고한다. 그런데 그 잠재력은 어떻게 증명되는가. 봉사활동, 독서경험, 연구활동, 리더십경험이라는 평가기준은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있는 가정의자녀에게 훨씬유리하다. 맞벌이가정의 아이가 방과후 편의점알바를 하는동안, 중산층가정의 아이는 부모가 알아봐준 봉사활동처에서 '의미있는경험'을 쌓는다. 이것을 '능력의차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둘째로 오늘날 한국사회의 능력주의는 성공한 사람에게는 오만을, 실패한사람에게는 수치심을 내제해왔다. 아직까지도 우리사회에 부모님찬스로 성공하고, 주가를 조작하는 일이 벌어지는 등의 반능력주의가 만연하지만, 능력주의 자체를 긍정하기엔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자연스러운것'으로 만드는 경우를 종종본다. 한국식 능력주의에 따르면 불평등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 된다. 재벌2세가 회장자리를 물려받는 것도, 의사자녀가 의대에 들어가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것도, 모두 '능력'의 문제로 포장된다. 그 사회의 모습은 우리 청년세대가 바래왔던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보다는 19세기 제정러시아의 모습과도 흡사할 것이다.


2030세대가 능력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이유는? 이들이야말로 능력주의의 가장 큰 희생자임에도 그렇게나 열정적인 이유는?. 분석은 간단하다. 자기계발서와 능력주의는 희망을판다. 지금은 힘들어도, 내 능력을 증명하면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다는희망. 이 희망이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건 청년 각개인이 어찌할수도 없고, 손볼수도 없는 즉, 불가항력한 현실(제도)뿐이다. 그 제도를 직시하는 것보다, 능력주의라는 신화를 믿는게 차라리 견딜만하다. 나의 힘으로 큰 성취를 이뤄낼 수 있다는 효능감이 강하니까.


안타까운건 성공신화를 따르는과정에서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하는 강박, 타인을 경쟁자로 바라보는 시선, 실패를 철저하게 개인의 무능으로 내면화하는 태도. 능력주의사회에서 우리는 서로를 공생의 대상이 아닌 비교의대상으로 바라본다. "저사람은 나보다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이런 판단이 일상화된 것이다. 모두가 각자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회에서, 함께 손잡고 제도를 바꾸자는 사람은 허망하거나, 현실과는 동떨어진 존재로 보이는 것이 현실아니던가.


우리가 잘알고 있다시피 여러 석학들은 SNS가 우리의 행복을 갉아먹는다고 경고한다. SNS를 보면 모두가 행복하고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이른새벽의 요가,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식사, 카페에서 유유히 노트북을 펼치고 일하는 모습까지, SNS는 이처럼 잘 연출된 성공과 행복의 모습을 끊임없이 전시한다. 이 모습을 보는 우리는 필연적으로 불안감을 느낀다. 나만 홀로 뒤처지고 있다는 걱정, 뒤쳐지지않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우리를 더 빨리 달려야한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타인은 더 이상 함께가야할 동료나 상부상조의 대상이 아니다. 타인은 우리가 밟고 올라서야 할 사다리의 한 칸이거나, 스쳐지나가는 '생명체'쯤으로 여겨진다. 이런사회에서 '연대'라는 단어는 성립할수도, 사람들에게 가닿지도 못한다. 어불성설인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마트폰을 집어들어 다른 사람들의 게시물을 확인한다. 누군가는 새벽 5시에 운동을 끝냈고, 누군가는 벌써 두번째 자격증을 땄으며, 누군가는 승진했다는 소식이 타임라인을 가득 채운다. 우리는 침대에 누워 그 게시물들을 보며 자괴감을 느낀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가, 나는 왜 아직도 이 자리에 있는가.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점심시간에도, 잠들기 직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성취를 확인하고 자신을 채찍질한다. 이 반복되는 비교와 자책의 루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나는 우리가 진정으로 갈구하는 것이 '타인의 인정'이라 본다. 좋아요수, 구독자수, 혹은 연봉과 직급으로 증명되는, 수치화된 성취와 이에 대한 타인의 인정말이다. 아침루틴이나 독서기록, 운동성과를 꾸준히 게시하는 행위이면에는 나를 보아달라, 나도 멋있고, 가치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욕구가 숨어있다. 과거에는 가족이나 회사에서 받는 인정으로 충분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불특정다수의 시선이 중요해졌다. 그 인정의 총량이 곧 나의가치를 증명하는 척도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인정욕구자체는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이 인정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신자유주의시스템하에서는 인정을 끊임없이 유예시킨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직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세련된 자기계발의 언어로 주입하며, '조금만 더' 노력하면 더 큰성공에 도달해서 많은 인정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심는다. 그결과, 잠시멈춰 하늘을 바라보는 행위는 감상적인 나약함으로 표현되어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기계발의 함정에 스스로 기어들어간다. 그 안에 성공과 타인의 인정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소수긴 하지만, 또래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비슷한 패턴을 발견한다. "요즘 너무 힘들어"라고 토로하면서도, 정작 "그럼 좀 쉬어"라고 하면 "그럴 수가 없어"라고 답한다. 왜 쉴 수 없냐고 물으면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당장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재촉하는 것도 아닌데 멈출 수가 없다고 한다. 성장과정에서 대부분의 욕구가 좌절되는 경험으로 인해, 아예 은둔하거나, 성취를 향해 달려가다가도 쉬는법을 몰라서 번아웃을 경험하고, 불안장애를 앓으며, 우울증으로 고생한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멈추는 순간, 우리의 존재가치가 사라지는 기분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사회가 굴러가는 원동력 중 하나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위 각 분야에서 정상을 찍은 '권위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시스템이 약속한 인정을 비교적 수월하게 획득한 이들이다.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들이 작금의 사회시스템을 설계했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의 성취를 듣기좋게 미화한 강연을 들으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한편, '저 자리에 오르면 많은 인정을 받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라는 갈망을 품어왔다. 밑바닥에서부터 자수성가한 소수케이스를 제외한다면, 자신들이 설계한 시스템에서 성공에 이른 그들조차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위치에서 있다. 성공적인 지위는 한번 획득하면 끝나는 신분따위가 아니라, 매순간 갱신되어야 하는 자격과 같다. 베스트셀러작가는 다음 책으로, CEO는 다음분기실적으로 자신을 입증해야 한다. 개인이 갈망하는 성공지향과 인정욕구를 체제의 생산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더이상 규율사회가 아닌 성과사회에 살고 있다. 규율사회의 구성원은 외부의 억압에 저항할 수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억압과 상명하복이 명확했고, 그래서 권력과 아래사이의 적대의식도 명확했다. 하지만 성과사회의 구성원은 스스로를 규제하며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되고자한다. 사회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 즉, 엘리트계층의 입장에서는 "나도 저 엘리트처럼 성공할 수 있다(Yes, we can)"라는 긍정의 언어를 개인에게 주입하는 것이 "너는 엘리트계층과 국가, 그리고 기업 위해 일해야한다(You must)"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통제장치일 것이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어서 별다른 거리낌을 체감하지 못한다. 나 역시 그렇다. 당연하게도 나를 포함한 청년들은 취업에 실패하면 사회구조를 탓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주거불안을 겪으면서도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자신의 소득문제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극대화된 자기책임의 논리는, 새로운형태의 감시메커니즘과 결합되어 더욱 공고해졌다. 한교수께서 지적했듯이, 현대의 감시체계는 미셸푸코가 언급한 판옵티콘에서 한술 더 뜬다. 감옥의 감시탑과 그곳에서 감시하는 교도관은 분명한 타도대상이라기도 했지 오늘날의 감시는 자발적으로 나를 전시함으로써 감시자가 감시하기 수월한 형태를 띤다. SNS에서 서로가 서로를 재단하고 판단하며 상호감시역할을 해온 것이 그 예시라고 볼 수 있다.


만약 내일부터 아무도 우리의 성과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우리의 SNS를 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우리의 직급과 연봉을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국 오늘날 혁명이 불가능한 이유는 위에서의 억압이 견고해서가 아니라는 것. 우리스스로를 너무나 효율적인 '생산도구'로 최적화하고 또 각 개인이 나의 성취와 성공을 위해서 그래야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청년들은 OECD기준 최장노동시간을 기록하면서도 그것을 '나를 위한 투자나 커리어를 위해 잠시 거쳐가는 단계'라 부른다. 그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소진되면서도 그것을 자신의 '회복탄력성 부족'으로 받아들인다. 이렇듯 신자유주의사회의 성공신화는 스스로에게 조금의 관대함도 허락하지 않는 강박을 주입해왔다.


정말 답답한 것은 나를 포함한 청년세대가 한교수의 이러한 진단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천으로는 옮기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교수의 진단을 접한 오늘날의 동료청년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맞아요, 시스템 문제인 거 알아요. 그런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건데요? 일단 저는 내일 중요한 면접이 있고, 다음주에 프로젝트 마감이 있어요."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것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개인적 실천사이의 간극. 한병철은 바로 이 간극이 신자유주의가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은, 이념경쟁의 승리요인이라 말한다.


한교수에 따르면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건 결국 상상력의 불가능이다. 청년들은 다른세계가 가능하다고 상상할 여유가 없다. 상호감시와 경쟁으로 연대는 이제 생소한 단어가 되었으며, 지배층에 대한 저항은 자본주의질서 안에서 소비패턴의 변화따위로 축소되었다. 청년세대에게 남은 것은 승리자가 정해져 있는 제로섬게임에서 경제의 최종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욕망과 배타적인 성취욕 따위의 것들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되, 선택지를 구성하는 자유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한번쯤 생각해보는 것. 제로섬게임에 참여할 수는 있으되, 왜 꼭 승자독식이어야 하냐며 게임의 규칙을 다시 쓸 수는 없다. 자유의 실질은 주어진 옵션 중에서 고르는 일에 국한되지 않고, 어떤 옵션이 가능한지를 규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허락한 우리의 자유는 전자에 국한되어 있다.


나 역시 알고 있다. 성공신화의 주인공들이 위선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실제로 피땀흘려 노력했고, 그 노력은 (그들이 물려받은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의 도움을 받아) 결실을 맺었다. 포인트는 그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사다리가 오직 한방향, 즉 위를 향하고 있다는데 있다. 사다리의 기울기(계층이동의 불가능성)를 조정하거나, 대안적 경로(성공 이외의 가치 ex 일상에서의 소소한 행복과 적성을 찾아나서는 일)를 모색하거나, 혹은 사다리자체가 없는 삶의 양식을 상상하는 일은 그들의 성공서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떠들어도 혁명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있는 그 형태로는 말이다. 하지만 다른형태의 저항은 가능하다. 거창한 데모구호나 체제전복 말고도 작지만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되는 저항말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과연우리가 원하는 것인가? 최정상을 찍는 성공외에 다른 삶의 가치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가? 사다리를 오르는 것외에, 피라미드 밖의삶은 상상할 수 없는가? 신자유주의가 굴러가는 동력을 파악하는 일.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을 인식하는 일.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병철교수가 말했듯, 혁명의 불가능은 곧 상상력의 불가능이다. 그렇다면 이글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과제는 명확해진다. 다시 상상하는 것. 다른세계를 꿈꾸는 것. 당장현실이 되지 않더라도 그 상상자체가 미래의 사회구조로 발현된다.


지금 당장으로서는 청년세대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지금의 성과사회에서 완벽하게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장황한 글을 쓰는 나역시 내일아침을 위한 알람을 맞춰놓을테고, 여전히 완벽주의에 집착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글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알고있다. 최정상을 향해가는 인생만이 정석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원자화된 사회가 각개인에게 죄의식을 심고 서로를 감시하는 시스템이 우리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조금은 어긋난 존재가 될 수 있다. 여러가능성에 대한 창의와 상상력을 기르는 일, 바로 지금 정치권을 바라보는 우리세대가 해야 할, 그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