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사람 예수

by 백재민 작가

성경의 서사중에는 시대마다 반복되는 인간사회의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한다. 예수가 공생애 초반, 자신이 자라난고향 나사렛회당에서 가르침을 펼치다 박대당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이 사건은 교인들 사이에서 흔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는 경구로 회자되며, 출신조직이나 지역의 업신여김 가운데에서도 특정인물의 소신을 높게평가하는 구절로 소비되어왔다.


나사렛사람들이 예수를 비웃고 박대한 첫번째 근거는 ‘신분사회질서’에 있다. 성경에 근거해 나사렛원로들의 입장을 살펴보자.마가복음 6장 3절은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목수가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라고 나와있다.


1세기 지중해연안은 이른바 ‘명예-수치’문화가 지배하던사회였다. 개인의 권위와 명예는 그의 능력보다 출신집안, 직업, 지역에 의해 규정되었다. 예수는 ’목수‘였다. 율법학자나 제사장같은 지식인계층이 아닌, 노동자계급이었던 셈이다. 회당의 원로들, 그러니까 지역의 ‘어른’들이 보기에 자신들 밑에서 자라며 그자신의 출신지역과 계급을 을 훤하게 드러낸 노동계급출신의 청년이 율법을 해석한다는 것은 기존의 사회위계를 정면으로 치는 행위였다. 여러 정황을 보고 예상했을 때, 나사렛원로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는 예수를 보며,


“나사렛촌놈이 사람들 인기좀 얻고 예루살렘 물좀 먹고 오더니 지가 메시아라도 되는 줄 안다”했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날 수 있느냐?”(요한 1:46). 나사렛은 구약성경은 물론, 탈무드나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작고무명한 변방의산골 마을이었다.


그런 보잘것없는 지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그것도 사회의 합의나 검증없이 예루살렘의 권위에 도전하는 듯한 가르침을 펼치는 모습은 눈엣가시였으리라. 지역공동체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원로들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통제권을 벗어난 ‘이질적 존재’의 출현이자,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읽혔다.


거기에 더해 결정적인 트리거는 따로 있었다.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원로들이 폭발한지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예수는 이사야서를 인용하며 ‘가난한 자’, ‘포로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을 선포한다. 처음에는 “은혜로운 말”에 놀라던(눅 4:22) 청중이 예수의 다음발언에 살의를 품게 된다.


예수는 엘리야시대에 이스라엘과부가 아닌 ‘이방인’ 사렙다 과부가 구원받았고, 엘리사시대에 많은 나병환자가 아닌 ‘이방인’ 나아만 장군이 치유받았다는 구약의 사례를 든다.


나사렛사람들이 격분한 지점은 “감히 우리(선택받은민족, 지역기득권)를 배제하고, 저 더러운 타자(이방인)를 구원의 서사중심에 두는가?“였다. 예수는 자신들만이 진리의 유일한 통로라고 믿었던 그들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것이다.


누가복음 4장 28-29절은 그 결과를 이렇게 기록한다. “회당에 있는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크게 화가나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권력은 상대적인 것이다. 나사렛회당 사건은 ‘기존의 룰’을 따르지 않는 자, 지배이데올로기에 편입되지 않는사람, 그리고 ‘그 지배층의 배타성’을 지적하는 이에 대한 박해를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이는 기존의 시스템에서 큰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는지를 보여주는 단락이 아닐까.

이렇듯, 우리는 예수님에게 ‘겸손’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박해당하셨다고 말할 뿐이다. 우리는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걸음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바른말로 미움받을 것이냐, 처신잘해서 내몸하나 건사하는 것으로 그칠것이냐하는 선택말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전자를 선택해야하지 않을까. 예수께서 가신길을 기꺼이 가겠다고 다짐한 성도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