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학창시절

큰학교, 작은사회

by 백재민 작가

경주라는 지역사회는 하나의 폐쇄된 학교였다. 그곳에서 찐따라는 타이틀은 또래집단 사이에서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이 낙인은 환경이 바뀌어도 좁은 지역사회라는 특성상 끈질기게 나를 따라왔다.


2010년대 경상도 남자중학교의 권력구조는 명확했다. 입학초기에 서열을 정하는 싸움으로 일진무리를 형성하고, '일진'으로 불리는 집단이 학교생활의 편의를 누리는 것이다. 선생들은 이를 남성성의 발현으로 바라보았는지 방치했다. 자연스레 교사집단과 학생들을 인솔하는 일진무리의 관계가 가까워진다. 서열의 최하층에 위치한 이들은 생존을위해 시스템에 적응해야 했다.

KakaoTalk_20251104_115136439.jpg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당시 소심한 성격의 나는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북에서 관심을 표현하던 여사친의 댓글도 그 의미를 모를정도로 말이다. 그일이 남학생들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킬만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가지고 있는 카리스마와 덩치, 그리고 리더십을 반절도 발휘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이라는 수식어가 나를 따라다닌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런 나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비웃음당하는 일이 많았고 나는 자존심이 상해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진 주먹다짐을 신청하고, 코피와 무릎의 부상을 감수하며 자신이 "만만한 놈"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다. 일진무리에 빌붙던 깐족이를 패다가 경찰에 넘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서열의 정점에 있는 '짱'이라는 녀석에게는 도전하지 못했다. 순진한 중학생에게 여러 영악한 일진들의 존경을 받는 짱은 내가 건드릴수도 없었거니와 무서웠다.


이는 학생사회 시스템내부에서의 생존전략이었으나 동시에 그 한계를 드러냈다. 서열다툼 안에서 싸우되, 그 서열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사립기독교재단 소속이었다. 지방전문대학 수준의 시설과 규모를 갖춘,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곳이었다. 그러나 물리적 인프라와 달리 '소프트웨어' 즉 교칙과 교사는 옛 권위주의의 그것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기독교정신을 근본정신으로 둔 학교였지만, 정작 그 안에서 작동하는 권력메커니즘은 성서가 말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일진집단은 그 권위주의적인 학교시스템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응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하며, 그 안에서 제한적인 입지를 가진다. 당연하게도 일진무리의 힘은 학교라는 울타리 밖에서는 무력했다. 권위주의학교시스템의 하위파트너 쯤 됐던 것 같다.


민중신학이 제시하는 해석의 틀은 이 같은 권력구조를 분석하기에 가장 적합하다. 최종원 선생님의 [거꾸로 읽는 교회사]는 상대적인 권력구조 속에서 약자가 차지하는 위치와 그 의미를 다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소극적이었던 찐따무리는 이 교실 생태계의 하층구조에 속한다. 이들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민중'적인 위치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언더도그마로 인한 오류가 있을지언정, 권력이 있고 폭력이 있는 곳이라면 하층구조에 놓인 사람은 약자다. 학교의 찐따무리와 일진무리를 다루니 가벼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런 비유는 어떨까. 바깥사회에서 살아가는 성인의 입장을 비교해보는 것이다.교사나 목사라는 권위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집단과, 언제어디서 산업재해로 큰 부상을 당할지 모르는 일용직노동자는 같은 처지일 수 없다. 언더도그마라는 단어하나로 약자의 괴팍함과 불친절을 지적할수는 있으나, 고전적인 약자로서의 위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2014년 당시 모습

성서는 나중된자 먼저되고, 먼저된자 나중된다고 선포한다. 약자가 지금당장에는 무력해 보이기도 하고 추해 보일지도 모르나, 결국 전도될 수 있음을 말한다. 오늘날 약자는 "잘 대해줘도 은혜를 모른다"거나 "목소리 크고 성질더럽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일 수 있다. 아무리 도와주고 싶어도 성격이괴팍하면 그럴마음이 싹 가시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아는 약자는 아무이유 없이 괴팍하지 않다. 사랑하는 자녀가 학교에서 집단린치를 당했는데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을 때, 병원에 데려가 부러진 코를 치료해줘야 하는데 월세와 밀린 빚을 갚아야 해서 그럴 수 없을 때, 부모된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진다. 그런와중에도 일터로 나가야 하고 집안일도 해야하는 사람에게 무슨 친절함을 기대한단 말인가.


성경은 심령이가난한 사람, 즉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 선포한다. 가난하고 배운것이 없어 곤궁한자에게 신의 관심이 쏠려있다는 이야기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절).


가진 자들이 정당하다고 여기던 질서에 작은 돌하나 던져보는 일. 그까이꺼 무슨 소용이겠나만은...후진 서열문화의 최하층, 그 최하층중에서도 가장 업신여김 받던 존재가 던지는 돌은 꽤나 상징적이었지 않을까. [거꾸로 읽는 교회사], 민중신학이 주목하는 대목에도 이런 특징이 있다. 낙후된 변방 그 최말단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저항은 분명 신의 최우선 관심사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