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를 걱정하기 때문에, 자주를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나도 좀 망설였다. 자주노선을 꺼내는 순간 어디선가 "또 주사파 얘기냐"는 반응이 날아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 반응이 왜 나오는지도 안다. 자주노선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북한정권옹호와 한 묶음으로 팔려왔으니까. 그 묶음을 만든 건 한국특유의 현대사적 맥락이 있었을테고 그 맥락을 전략적으로 활용해온 특정정당과 세력이 있어왔기에 그렇다. 근데 최근들어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자주를 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안보를 갉아먹는 짓 아닌가.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서 그냥 써본다.
트럼프가 그린란드를 돈주고 사겠다고 말하며 많은 사람들을 놀래켰다. 대다수가 "미친놈...트럼프가 트럼프했네"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같은 말이 두 번, 세 번 반복되고 군사적 옵션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농담의 영역을 벗어났다. 우크라이나전쟁 3년차를 달려가는 요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밀어붙이며 안보이익을 말한다. 미국은 파나마운하의 통제권을 다시 거론했다. 이란을 둘러싼 긴장은 중동의 지형을 다시 흔들고 있다. 역사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이 2025년에 다시 펼쳐지는 중이다. 좌파로서 제국주의가 그저 나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잠깐 얼굴을 바꾸고 있었을 뿐, 제국은 인류사에서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다.
제국은 친절할 때 가장 강하다.
대놓고 지배하는 방식은 효율이 나쁘다.
현대의 제국은 대놓고 지배하는 대신 다양성을 환영한다고 말해왔다. 이민자의 언어는 존중받았다. 문화적 차이도 존중한다고 했다. 그 제스처가 완전히 거짓이라고는 할 수 없다. 진심인 부분도 분명있다. 다만 그 다문화수용이 어떤 조건아래 이뤄지는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허용되는 다양성은 제국의 이익에 순응하는 형태의 다양성이다. 제국의 이익에 반대되는 다양성, 그러니까 패권에 도전하는 다양성은 환영받지 못한다. 사회정의로 떠받들여진 다문화주의는 제국 스스로의 이익계산 쪽에도 큰비중을 차지한다. 다양성은 제국유지의 수단이다. 그람시가 헤게모니라는 말로 정리한 것이 이거다. 시민의 동의에 의한 지배. 피지배자인 일반사람들 스스로 지배질서를 내면화하고, 그 질서를 자신의 양식으로 받아들일 때 제국은 가장 효율적으로 작동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제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오게 만드는 기술인 셈이다.
한국은 이 기술의 작동을 꽤 오랫동안, 꽤 성공적으로 경험해온 나라다. 미국이 한국에 허용한 다양성은 명확한 허용범위안에 있다. 외교와 국제정세만을 봤을 때 우리의 경제성장은 미국이 설계한 자유무역질서에 함께한 덕분이다. 안보의 외곽선은 주한미군이 그었다. 그 안에서 민주화가 찾아왔다. 문화산업이 성장하고, 이제는 K-콘텐츠가 세계시장에 안착했다.
미국주도의 국제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한국은 충분히 번영했다. 나쁜거래가 아니었다. 근데 거래는 거래다. 거래의 성립의 조건을 누가 정했는지, 그 조건이 바뀌면 어떻게 되는지를 잊으면 곤란하다. 번영이 제국아래 종속된 이후 가능해졌다는 사실은 번영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번영이 어떤 토대 위에 서 있는지를 직시하는 일은 필요하다. 우리의 번영은 미국 주도질서의 정당성을 스스로 증명하는 방식으로 가능했다. 다시한번 언급하지만 그 자체는 아무문제없다. 제국은 언제나 존재해왔고 중견국이 제국중심의 질서에서 실리를 챙기는 일을 두고 비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제국중심의 질서에 거센말투로 욕지거리하는 집단은 북한같은 체제뿐이란걸 보면 이는 명확해진다. 문제는 강대국이 허용한 다자주의 범위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그 기준을 누가 정하는지가 언제나 불분명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지금,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가 갑자기 매우 분명해지고 있다.
한국의 청년세대가 미국에 대해 가진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그게 보인다. 미국은 명실상부 제국이다. 적어도 우방국에게는 일정정도의 자주와 자결권을 인정하는 제국이었다. 경찰국가를 자처하며 최소한의 대의명분을 따졌다. 소프트파워로 세계를 이끌면서 직접적인 침략보다 우방국의 동의를 끌어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노동자의 작업복에서 패션의 상징이 된 청바지와 세계각국의 국룰로 잡은 민주적 사고방식이 그 뒤를 따랐다. 이러한 질서 앞에서 미국은 군사강국의 얼굴보다 국제사회가 기준삼을만한 국가의 얼굴에 가까워 보였다. 한국의 청년들이 반미에 거부감을 느끼고 미국을 선망했던 이유에는 미국이 우리에게 누릴 만한 무언가를 제공해왔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정의를 수호하고 자유롭고 개척정신아래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간다는 미국민의 이미지가 세계를 매료했다. 아메리카드림에 이어 코리안드림이 열풍이었던 것도 그러한 양식수용으로 가능했다. "미국은 무조건 오케이!"하는 어른들의 세뇌 같은 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내 또래 청년들에게 있어서 미국이라고 하면 일단 세련된 국가를 떠올리지 않나. 자발적인 종속인 셈이다.
그런데 지금의 미국은 스스로 쌓아올린 공든탑을 허물었다. 우방국의 영토에 포함된 자치국 그린란드를 돈주고 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선 파나마운하를 되찾겠다는 말이 미국 대통령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다. 동맹국에게 방위비를 청구하는 방식은 그 연장선상에 놓였다. 미국사회 리버럴엘리트가 정권을 잡을 때마다 강화된 소프트파워가 레드넥이라 불리는 백인노동자의 지지에 힘입어 집권한 트럼프식 제국주의에 의해 힘을 잃어가고 있다. 힘이 있으니 갖겠다는 논리가 미국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세기 열강이 저지른 방식이 돌아온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저지른 만행과 다르지 않다. 러시아는 안보이익을 내세운다. 미국은 지정학적 필요를 앞세운다. 겉표지만 다르다. 둘 다 결국 약한쪽의 운명이야 어떻든 강한쪽이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 위에 서있다. 헤게모니의 위기는 언제나 혼란을 불러온다. 우리는 지금 그 혼란을 목격하는 중이다.
여기서 자주노선 이야기를 꺼내면 한국에서는 묘한반응이 나온다. 특히 청년세대 안에서. 자주노선이라는 말이 북한정권에 친화적인 이미지와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전통적인 NL운동권 일부가 자주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북한정권을 옹호해왔다. 그 이미지가 자주노선 전체를 덮어버렸다. 통합진보당 해산 등이 과정을 거치며 결과적으로 자주노선을 거론하면 주사파논쟁으로 빠지는 구도가 굳어졌다. 그 구도 안에서 청년세대의 안보의식과 자주노선은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여왔다. 안보를 중시하면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해야 하고, 동맹을 강화하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는 흐름이 그래왔다.
그런데 그 구도를 만들어온 전제 자체가 최근의 현실에 의해 해체되고 있다.
자주노선이 북한친화적이라는 인식은 냉전구도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미국 아니면 소련, 자유진영 아니면 공산진영이라는 이분법이 작동하던 시대에, 미국으로부터의 자주를 말하면 자동으로 그 반대편에 서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의 미국은 우방국에게도 방위비용 청구서를 보내고, 동맹국에 대한 예의 대신 이윤의 논리를 들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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