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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덕현 Oct 28. 2024

나의 아저씨와 서소문 아파트

중년기의 한국사회


“이 건물 밑이 원래 하천이야. 야 봐봐. 물길 따라 지어가지고 이렇게 휘었잖아. 복개천 위에 지어가지고 재건축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아. 나도 터를 잘못 잡았어. 지구에 태어나는 게 아닌데...”- '나의 아저씨' 중에서

나의 아저씨 4회

'나의 아저씨'가 방영될 때 내 나이도 오십을 막 넘기고 있었다. 87학번인 나의 대학시절만 해도 최영미 시인이 '서른, 잔치는 끝났다'고 할 정도로 서른만 넘으면 인생이 꺾어지는 줄 알았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로 시작하는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도 그렇다. 지금은 달라졌다. 서른에 결혼하는 이들은 거의 없어졌고 마흔이 넘어야 이제 중년에 들어선다고 여긴다. 중년과 노년의 나이 개념이 달라져서 오십을 넘겼는데도 여전히 중년이란다. 몸은 여기저기 고장나 삐걱대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한국인들의 중년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갖지 않으려는 현 세태와 맞물려 점점 뒤로 늦춰지는 것처럼 보인다. '영피프티'라는 말이 나오고 있지만 그건 피프티도 영했으면 하는 오십대 당사자들의 마음과, 중년에도 일을 더 해야 사회가 돌아가게 된 현 한국의 인구구성의 절박함이 만나 생겨난 말이 아닐까 싶다. 실로 오십대 중반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얼굴에 주름이 생겨나고 허리는 구부러지기 시작하고 기력도 예전같지 않아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해지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도 독립하려 하지 않으려는 청춘들의 모습이 점점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가는 현 한국사회에서 오십대 가장이 쉰다는 건 언감생심이다. 거북목에 오십견을 달고 살면서도 아픈 몸을 이끌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예외는 아니다.


박해영 작가의 '나의 아저씨(4회)'에는 박동훈 부장(이선균)이 회사 동료들과 퇴근 후 한 잔 걸친 후 대폿집을 나서 나란히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 보여지고 언급되는 곳이 바로 서소문 아파트다. 서대문구 미근동에 지금도 현존하는 아파트. 1972년에 지어진 이 낡고 오래된 아파트는 앞뒤로 세워진 현대식 건물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서 있는데, 마치과거의 한 부분이 담긴 이물질처럼 보여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후배가 "우리 부장님 이 건물 진짜 좋아해"라며 "이 낡은 데를 왜 이렇게 좋아하세요?"라고 묻자 박동훈은 이렇게 말한다. "나랑 같애." 그리고 박동훈은 그 아파트가 바나나처럼 살짝 휘어져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하천 위에 지어져 그 흐르는 물길을 따라 짓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 그래서 재건축도 할 수 없단다. 실제로 이 아파트는 그간 노후되어 끊임없이 재건축 이야기가 나왔지만 무산된 곳이다(현행법 상 하천 위에는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대로 두면 박동훈 말대로 수명 다하면 없어질 처지다.

서소문 아파트의 현재 모습

기억이 가물가물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1980년 즈음 나는 그 서소문 아파트에서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덕수초등학교로 전학을 온 후 두번째 거처다. 고향인 경기도 안성을 떠나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한 곳은 광화문 신문로2가 뒷골목에 있던 단칸방이었다. 지금은 재개발되어 빌딩이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집을 나서면 오밀조밀 모여있던 집들과 절벽처럼 높은 담벼락 사이에 놓여 있던 길다란 골목길이 학교가는 길이었다. 매일 그 길을 오갔고, 가끔은 친구들과 그 골목길에서 놀았다. 차도처럼 똑바로 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구부러진 길. 그래서 공놀이를 하다 놓치기라도 하면 공이 자꾸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그 구부러진 길은 당시 쉽지만은 않았을 시골 소년의 서울살이에도 아늑함과 편안함을 줬다.약 2년 후 우리는서소문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학교까지는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그 아파트에도 구부러진 골목길이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아파트 앞쪽의 골목길에는 돼지머리가 놓여져있던 대폿집들이 죽 늘어서서 하루의 고단함을 소주 한 잔으로 풀어내는 아저씨들을 반기곤 했는데, 늘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대폿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술 한 잔을 할 때면 그래서 그 냄새를 따라 그 때의 그 구부러진 골목길이 기억 속으로 떠오르곤 한다. 나는 당시 7동 7층에 살았는데, 지금도 7동과 8동 사이에 있는 비밀통로(?)를 통과해 있는 서서갈비집에서 가끔 누군가를 만나곤 한다. 고기 한 점에 소주를 기울이다 보면 그 때의 기억이 아련하다."나랑같애"라는 박동훈의 말이 남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 굳이 서소문 아파트를 자신과 동일시하며 말하는 대목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다. 이 드라마는 이제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박동훈의 이야기를 그의 직업에 빗대 은유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박동훈은 구조기술사로 건물의 안전을 진단하는 일을 한다. 그는 "모든 건물은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라며바람, 하중, 진동 같은외력들을 계산하고 그 힘에 건물이 버텨낼 수 있는 내력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게 그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일에서 인생을 은유한다. "인생도 어떻게 보면 외력과 내력의 싸움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있으면 버티는 거야." 그래서 자신이 맞이한 중년의 위기들도 애써 버텨보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인지가 헷갈린다. 중년의 위기를 건물에 빗대서 꺼내놓은 이 대목은 그래서 한국사회가 헌재 맞이하게 된 중년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아저씨 8회

70년대 개발시대를 거칠 때만 해도 한국사회는 팔팔했던 청년의 시간을 구가하고 있었다. 서소문 아파트도 지금은 낡고 오래되어 초라해 보이지만 1972년 처음 지어질 때만 해도 연예인과 부자들이 좋아하던 아파트였다. 1층에 상가가 있는 주상복합아파트로 편의성이 좋았고, 무엇보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서다. 하지만 그렇게 세간의 주목을 받던 당대의 잘 나가던 건물들도 낡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개발시대의 관성이 남은 한국사회에서 낡는다는 건 재개발되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낡은 건 사라지고 새로운 건 계속 세워졌다. 먹고 살려는 욕망이 펄펄 끓던 청년의 시절을 그렇게 지나왔고 이제는 중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그 욕망은 꺼지지 않는다. 개발시대를 거치며 한국이 이른바 '빈티지'의 멋을 잃어버린 건 안타까운 사실이다. 낡은 건 버려야 하는 것이고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그 시대의 휩쓸림 속에서 탄생했다.지금도 매일 세워지고 있는 아파트들은 바로 그 여전한 개발시대의 관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물들이다. 그건 마치 외력에 의해 조금씩 낡아지고, 흔들리고, 결국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자연법칙을 애써 거스르려는 욕망처럼 보인다.


그 욕망이 헛된 일이라는 건 나이 오십을 넘어보면 다 알게 된다. 몸이 예전같지가 않다. 처음에는 그걸 어떻게든 이겨내보려 애쓰지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 젊어서는 아무 일도 아니었던 먹고 자고 싸고 하는 일들이 나이가 들어가면 하나하나 쉽지만은 않은 일들이 된다. 많이 먹어서 괴롭고 적게 먹어서 괴로우며, 잠을 잘 수 없어서 괴롭고 너무 쉽게 피로해져 저도 모르게 잠이 들어 괴롭다. 또 먹으면 나오는 게 당연한 그 일조차 갈수록 쉽지가 않다. 그걸 욕망으로 버티다가는 더 괴로워진다. 그럴 때는 그러려니 해야 편안해진다. 이처럼 나이 들면 쾌락의 욕망보다 더 커지는 게 편안함에 이르는 일이 된다.

나의 아저씨

한국사회는 이제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에 접어들고 있는 중이다. 인구구성도 그렇고 사회의 성장 곡선도 그렇다. 중년의 나이에 청년을 고집하는 일은 헛된 일이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아무 것도 갖지 않은 인간이 되어 보겠다"며 스님이 되어버린 그 친구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든 버텨내려 고생고생하고 아등바등하며 사는 자신의 삶이 과연 맞는지 모르겠다고 털어놓는다. "나를 안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금이 가기 시작하면 못 견디고 무너지고,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 나를 지탱하는 기둥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내 진정한 내력이 아닌 것 같고. 그냥, 다 아닌 것 같다고..." 그 지글지글한 중년의 버텨내기 위한 안간힘을 통과해, 박동훈은 더이상 버텨내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편안해지기를 선택한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재개발 이야기가 솔솔 피어났다 사라지곤 하는 서소문 아파트도 좀 편안해졌으면 한다. 조만간 서서갈비에서 옛친구들과 만나 소주라도 기울여야겠다. 낡고 오래됐지만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그 친구들과.

2024.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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