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칠판

by 푸른 잎사귀

서기 1982년 6월 17일 목요일 날씨 맑음

오늘의 중요한 일 : 없음

오늘의 착한 일 : 없음

일어난 시각 : 오전 6시 30분


우리 혜아 언니네는 칠판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없었다. 나는 엄마한테 사달랬다. 엄마께서 사준다고 하셨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 엄마 참 좋다고 우리 엄마만 아니다. 우리 식구 모두 좋다.


잠자는 시각 : 오후 10시

오늘의 반성 : 없음

내일의 할 일 : 없음




얼마 전 일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큰엄마께서 야쿠르트 장사를 하셨다는 거였다.

그렇게 번 돈으로 큰딸 혜아 언니에게 칠판을 사주셨겠지.

큰 집 혜아언니는 얼굴도 예쁘고 심성도 곱다.

혜아 언니가 25살에 결혼할 때 나는 세상에서 이렇게 예쁜 신부는 없다고 생각했다.

늘씬한 몸매에 어울리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교회에서 결혼을 하였다.

교회에서 만난 남편은 친정식구들에게 아들처럼 싹싹하게 잘한다는 소문이 내 귀에도 들렸다.

야리야리한 몸으로 임신을 하여 남편을 똑 닮은 아들을 출산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 것 같았던 혜아언니는

아들이 세 살이 되었을 무렵 이혼을 했다.

배우자의 외도가 원인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뒀다가 다시 생계 때문에

전에 다니던 보험회사를 다니게 된 혜아언니를

결혼 전부터 연모했었던 소장이 끈질긴 구애를 펼쳤지만

언니는 홀로 그 꽃다운 나이에 아들을 키우며 모진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견뎌냈다.


큰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혜아 언니는 울지 않았다.

엄마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하며 오히려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 일기에 혜아언니가 나와서

잠시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다룬 여러 소설들의 주인공들을 생각해 보았.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소설 속 주인공보다 더 주인공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이리라.


큰엄마가 사준 칠판에 혜아 언니는 어떤 꿈들을 적으며 놀았을까.

큰엄마의 바람대로 혜아언니는 살고 있었을까.


내가 칠판을 사달라고 한 건

학교놀이를 하고 싶어서였다.

분필로 쓱쓱 칠판에 글씨를 써가며 선생님도 되어보고 학생도 되어보는 학교놀이.


장래희망을 쓰는 칸에 선생님이라고 적어놓고는

교대를 가겠다는 꿈을 품지도 않았던 어린이였다.


그러나

나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며 선생님이라는 말을 듣고 있으니

장래희망을 소박하게나마 이룬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