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6일

-동생이 밥을 먹다 말고 나온 이유

by 푸른 잎사귀

서기 1982년 9월 26일 일요일 날씨 맑음


오늘의 중요한 일 : 없음

오늘의 착한 일 : 없음

일어난 시각 : 오전 6시 35분


명성약국 있는 데로 이사를 간다. 반장, 부반장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왔다 갔다 한다. 또 내 짝꿍도 산다. 내가 내 짝꿍을 보니까 내 동생이 밥을 먹다 말고 쭈르르 나왔다.


잠자는 시각 : 오후 9시

오늘의 반성 : 없음

내일의 할 일 : 없음



하필 이사 가는 곳이

날 괴롭히고 장난을 많이 치는 짝꿍네랑 가까운 곳이라니.ㅜ,ㅜ

학교랑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간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런가

그곳엔 반장, 부반장도 산다.


내가 얼마나 짝꿍 흉내를 내고

이야기를 많이 했으면

동생이 밥을 먹다 말고

구경하겠다고 쭈르르 나왔을까. ㅎㅎ


명성약국은 말 그대로 그 동네에서 명성이 높은 약국이었다.

의약분업하기 전엔 약사들이 웬만한 증상에 대한 약은 다 처방하여 약을 지어 주곤 하여서

허약체질에 잔병치레가 많은 나는 약국을 병원삼아 자주 오가곤 했었다.


약국에 들어서면 늘 인자한 엄마의 얼굴을 하고

낮은 톤에 높낮이가 없는 차분한 음성으로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물어봐 주시는 그 목소리와 눈빛만으로도

내 병은 다 나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었다.


약사님네는 동네에서도 부자였다.

그 당시 지하가 있는 2층 단독주택을 가지고 계셨으나

한 가지 근심은 아이가 없는 거였다.

동네에서는 명성약국 약사님이 40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자

남편이 바람을 펴서 낳아온 딸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있다는 소문이 알음알음 쉬쉬하며 소문이 나있었다.


그 모진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신 약사님은

45살이 되었을 때쯤 기적적으로 아들을 낳아서

그동안의 설음을 씻을 수 있었다.


십 년 전쯤에 옛날에 살던 동네를 가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흰가운을 입고 계셨는데

지금은 어떤지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어린 시절엔 어른들의 아픈 사연의 이야기들이

그냥 큰 의미 없이 지나갔었는데

철이 들고 늙어갈수록

그 아픔과 설음이 얼마나 컸을지를

품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그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다는 증거고

그게 삶이라는 과정이고 깨달음의 시간이고 인생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