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튀고, 그림은 검어졌다

1월 3일 ~1월 4일

by 푸른 잎사귀

1월 3일 월요일 날씨 : (맑음)


(열한 살의 내가 쓴 일기)


숙제를 다해놓고 병원놀이를 하였다.

내가 의사 선생님도 대고 간호원도 댔다.

혜주가 혜미를 대리고 오면

주사에다가 물을 부어 맞쳐준다.

나는 별루 재미있지도 앉은데

혜주가 억지로 하래서 할 수 었이 한거다.

나는 생경질이 나서 주사기에다 물을 놓고

혜주한테 막 뿌렸더니

엄마가 그때 들어오셔가지고 야단을 치셨다.

나는 잘못했읍니다라고 말했다.



1월 3일 일기를 읽고


엄마가 전에 주사기에 물을 넣어

놀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도

열한 살은 병원놀이를 하며

여전히 주사기에 물을 채운다.


그게 병원놀이의 일부였고,

그렇게 노는 일이 분명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일기에는 재미없었다고 적혀 있다.


열한 살이 되어서였을까.

병원놀이는 더 이상 설레지 않는

놀이가 되어버린 걸까.


마음이 시들해진 상태에서

혜주가 계속하자고 하니

짜증이 났고,

그 짜증이 주사기 속 물이 되어

동생에게로 튀었을지도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정말 혜주가 억지로 시켜서였을까.

아니면 재미없어졌다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걸까.


엄마에게 야단을 맞고

“잘못했습니다”로 끝나는 일기.


설명도, 변명도 없다.

그래서 더 궁금해진다.


그날의 열한 살은

어떤 마음으로 그 문장을 적었을까.





1월 4일 화요일 날씨 : (흐림)


(열한 살의 내가 쓴 일기)


인어공주를 그렸다. 참 예뻤다.

혜주는 나보다 더 잘 그렸다.

나는 심술이 나서 혜주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검정색으로 색칠을 하였다.

혜주가 와서 누가 그랬냐고 말했다.

나는 몰른다고 그랬다.

그러다가 혜주가 엄마한태 일러서

나는 꾸중을 들었다.

내일부터는 밝은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칭찬만 받을 것이다.



1월 4일 일기를 읽고


그림을 그리던 열한 살.

인어공주는 예뻤지만

동생의 그림은 더 예뻤다.


그 순간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아니면 그냥 속상함이었는지.


그렇다고 해서

혜주가 화장실에 간 사이

검은색으로 덮어버렸다는 대목에서

지금의 나는 잠시 멈칫한다.


이 일기를 읽는 내가 난감해지는 이유는

내 안에 그런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어제에 이어

혜주와 자주 부딪히는 모습이 보인다.

가까워서 더 부딪혔고,

비슷한 나이라서 더 예민했을 것이다.


그런데 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의외로 맑다.

“내일부터는 밝은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칭찬만 받을 것이다.”


열한 살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음은 다시 고를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이 다짐이

꾸중보다 오래 남는다.


열한 살의 깨달음은

지금 읽어도

참 예쁘다.



아래는

내가 실제로 열한 살에 쓴

그날의 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