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5일 ~ 1월 7일
1월 5일 수요일 날씨 : (맑음)
(열한 살의 내가 쓴 일기)
오늘 낮에 공부를 하였다.
그때 정연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도둑놈인지 알았는데 정연이였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정연이가
몰래 옷에서 그림 일기장을
가지고 와서 일기를 썼다.
나는 색칠을 하였다.
정연이가 고맙다고 하였다.
1월 5일 일기를 읽고
정연이는 왜 노크도 없이 들어와
열한 살을 그렇게 놀라게 했을까.
얼마나 놀랐으면
도둑놈인 줄 알았다고 적어두었을까.
정연이는 왜 그림일기장을
옷 속에 몰래 넣어 가지고 왔을까.
일기는 집에서 써야 하는 거라고,
밖에 들고나가면
엄마에게 혼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노크 없는 방문도,
숨겨 온 일기장도
호기심 많은 초등학교 여자아이의 행동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짧은 기록 속에서
두 아이의 우정이 보인다.
정연이가 쓴 일기에
내가 색칠을 해주었다는 문장 때문이다.
정연이는 고맙다고 말했고,
열한 살은 아마
조금 뿌듯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누군가가 나를 믿고,
조심스레 의지하거나
작은 도움을 건넬 때
여전히 마음이 따뜻해진다.
1월 6일 목요일 날씨 : (맑음)
(열한 살의 내가 쓴 일기)
노래 자랑을 하였다.
정연이는 교회노래
나는 은하철도 999
혜주는 아기곰 제키
그리고
혜미는 뽀뽀뽀
그리고
내가 심판을 하였다.
재일 잘한 사람은 혜미다
우리는 혜미한태 꽃다발 금매달 등
여러 가지 다 푸려졌다.
혜미는 좋아가지고
노래를 아무렇게 노래를 불렀다.
1월 6일 일기를 읽고
오늘의 놀이는 노래자랑놀이.
정연이는 교회 노래를,
나는 은하철도 999를,
혜주는 아기곰 제키를,
혜미는 뽀뽀뽀를 불렀다.
그리고 심판은 나.
제일 잘한 사람은 혜미.
꽃다발과 금메달이 주어지고
꽃가루까지 뿌려진 뒤,
기분이 좋아진 혜미는
아무 노래나 부르기 시작한다.
이 짧은 기록을 읽는 동안
그 시절의 노래들이
하나씩 다시 떠오른다.
잠깐, 시간을 건너간 기분이 든다.
매일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하루를 채우던 어린이들.
지금 돌아보면
그 하루하루가
어른의 삶만큼이나
치열하게 느껴진다.
1월 7일 금요일 날씨 : 비
(열한 살의 내가 쓴 일기)
개구리 소년을 보았다.
제목은 푸른 하늘을 날아라였다.
혜미는 슬픈 게 나오면 울었다.
아니면 엄마 있는 부엌에 가서 울었다.
혜주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보았다.
나는 그래도 슬픈 게 나오면 울으는 혜미가 귀였다.
1월 7일 일기를 읽고
개구리 소년.
제목은
‘푸른 하늘을 날아라’라고 적혀 있다.
인기 만화였던
개구리 왕눈이.
그 소제목까지 정확히 적어둔
열한 살의 꼼꼼함이
새삼 놀랍다.
세 살이던 혜미는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울었고,
엄마가 있는 부엌으로 가서 울었다.
아직 아기였다는 증거처럼
그 장면이 선명하다.
열한 살은
동생들의 만화 감상 태도를
차분히 기록한다.
혜미는
슬픈 장면이 나오면 운다.
혜주는
한눈팔지 않고 끝까지 본다.
그리고
한눈팔지 않는 둘째보다
울면서도 귀여운 막내에게
마음이 더 간다.
막내는
언제나 막내 같다.
그리고 우리 집 둘째는
어릴 때부터
야무지고 똑똑했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보았다는
그 한 줄에서
혜주는 이미
지금의 혜주를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래는
내가 실제로 열한 살에 쓴
그날의 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