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마음엔 색을 입히고, 나의 도화지는 비워두었다

by 최혜숙


"이번에 개인전을 하게 되었어요, 선생님을 초대하고 싶어요!"


지인 중 미술을 전공하여 갤러리에서 전시를 여는 분이 있다. 생애 첫 개인 단독 전시라는 것이 그분에게 주는 의미는 참 남다를 것 같다. 단체 전시가 '함께' 모여 힘을 나누는 자리라면, 단독 개인전은 오직 '나'라는 사람만을 온전히 보여주는 일종의 콘서트와 같은 자리가 아닌가.

지인의 전시회장으로 발길을 옮기던 순간, 나에게도 묵직한 질문 하나가 던져졌다.

'나도 그림을 참 좋아하는 사람인데…'

이 짧은 혼잣말과 함께 내 과거가 소환된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초등학생 때의 내가 있다. 교내 글짓기, 붓글씨, 그림 그리기, 등 사생대회가 유독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런 나는 자주 상을 탔던 아이였다. 특히 붓글씨는 학교 대표로 외부대회에도 곧잘 나가 수상도 했으니 하하하, 잘 썼었나 보다 싶다. 글짓기와 그림 그리기도 꽤나 재미있었던 활동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중학생이 되면서 미대 진학은 나의 꿈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선택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경제적인 이유로 단번에 거절하셨고, 당시 '착한 딸 콤플렉스'를 앓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에 내 꿈을 지워버려야 했다. 나는 착한 딸이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난 착한 딸이라는 이름으로 내 욕구를 쉽게 내던졌던 지난날의 나의 행동을 끔찍하게 후회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나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내 꿈을 위해 난 직접 화방에 가 아그리파와 비너스 석고상을 구입하여 배우지 않았던 미술 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얼마나 행복했던 순간이었는지 지금도 아찔하다. 아련하다. 연필 끝에서 묻어 나오는 금빛 흑연 가루가 입혀지는 터치들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지는 순간들..


성인이 된 20대, 별다른 꿈 하나 없이 심드렁하게 다녔던 대학을 졸업한 후 첫 직장이었던 00대 병원의 미술반에서 미술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난 신경정신과 검사실에서 근무했다. 미술 강사님과 직원들(주로 간호사들이 많았음)과 정기적으로 모여 미술을 이야기하고 현대미술관을 다니며 그림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던 시기였다.

결혼한 후 아이 둘을 낳고 키우던 30대, 돌아보니 내 삶은 취약했고 현실에 헐떡거리고 있었다. 당장의 육아비가 필요했고 어느새 내 꿈보다는 아이들의 꿈이 무엇인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난 늘 그림을 잊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와 동행했던 미술 전시관, 스케치북에 놓인 크레파스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갔던 일상들이 이어졌지만 난 내 꿈을 위해 그 무엇도 선택하지 못했다. 내 손에 잡혀있었던 것은 붓이나 물감이 아닌 내 생활이었고 내 현실에 더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그림은 뭐랄까, 채우지 못한 내 인생의 한 모퉁이 같은 아련함이다. 그 길을 가고 싶었는데 선택하지 못해 다른 길을 돌아 돌아왔다. 하지만 그 길을 잃은 적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40대, 5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선택하지 못했던 길. 아이를 독립시키고 내 일(job)을 지키고 완성하기 위해 애써야 했던 상황들이 내게 왔다. 상담이라는 길고 먼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그림이라는 길은 다시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어제 오후, 갤러리에서 마주한 지인의 그림들은 너무나 환상적이었다. 그림 뒤에 숨겨진 스토리를 알게 되니 캔버스 위에 더 큰 생기가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 내 안에서도 묘한 생동감이 꿈틀댔다.

'다시 할 수 있을까, 다시 하고 싶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지만 한편으론 자문하게 된다. 진정 나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일까? 정말 간절했다면 이미 그리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내가 마주하고 있는 건 그림 그 자체보다, 예전에 가보지 못했던 그 길에 대한 미련과 서운함,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나는 그림 자체가 아니라 '꿈을 꿀 수 있었던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림과 상담을 애써 연결해 본다. 사람의 마음에 무지갯빛 물감을 뿌릴 때 나타날 수 있는 갖가지의 모습들. 그런 다채로운 모습들을 마주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 어쩌면 사람의 마음도 그림과 같은 건 아닐까.

나는 오늘도 오락가락 내 마음의 길을 헤매고 있다. 나는 상담을 하며 타인의 마음에는 정성껏 색을 입혀주고 있지만, 정작 내 마음의 도화지는 여전히 하얗게 비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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