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끈을 묶는, 나무늘보의 역설

by 최혜숙



2000년생인 아들은 둘째로 태어났다. 세 살 터울 누나의 등을 보며 자란 덕일까. 아들은 좀 더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어릴 적 사진과 동영상을 보더라도 누가 봐도 개구쟁이다. 아들은 그렇게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엄마인 내게 찾아왔다.


사실 이 아들을 만나기까지는 짧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결혼 후 3년이 지나 첫 아이를 임신 헸을 때 성별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그저 친구 같은 딸이면 좋겠다 싶었다.

첫딸이 세상을 볼 때, 대전에 사는 동서네에 갔을 때다.

축복대신 돌아온 건 아들이 아닌 '딸'에 대한 서운함이었다. 내 딸의 존재를 함부로 평가하는 동서의 말에 화가 났다. 나는 참지 않고 한마디 했다.


"형님은 첫 딸 낳으시고 서운하셨나 봐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말을 한 나를 칭찬해 주고 싶다.

그 사건이 후 나는 내심 둘째는 아들을 낳겠노라 결심했다. 그렇게 나름 '계획'하에 세상을 맞이한 놈이 둘째 아들이다. 기막힌 태몽과 함께.

그렇게 귀하게 만난 아들이 지금은 '졸업유예'라는 인생의 쓴맛을 보고 있다.


4년 내내 전공 공부에 매달려 4점대 학점을 지켜온 성실함이 무색하게 석사과정 입학에 낙방을 경험했다.

녀석은 지금 무기력의 늪에 빠져있는지도 모른다. 엄마 눈에는 도통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꼴을 보기 어렵다. 지난 방황의 겨울, 영어 시험 점수는 제자리걸음이고 공부는 뒷전인 거 같아 엄마마음은 타들어간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대학생활 내내 하던 운동과 식단관리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공부는 열심히 안 하는 것 같은데 운동과 식단관리만큼은 지독하게 지켜낸다.

원래 나무늘보 성향을 가진 녀석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운동은 녀석에게 '생명줄'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자신은 결코 지탱할 수 없다는, 무너지지 않으려는 절실한 마음으로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복잡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녀석을 잠식할 때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할 수 있는 근육의 고통과 땀방울만이 녀석이 살아있음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도구가 되어 주는 건 아닐까.


공부는 결과를 보장해 주지 않지만, 운동은 정직하게 몸에 남으니까.


그 기묘한 루틴을 이어가는 아들을 보면서 나는 안도와 기막힘을 오간다. 그래도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무기력의 끝자락에서도 운동화 끈을 묶는 그 마음이 살아 있어서. 그 작은 움직임이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공부로,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기지개가 되어줄 거라 믿어보는 수밖에. 난 녀석의 엄마니까.


"아들아,

너의 속도대로 세상을 향해 기지개를 켤 수 있도록,

엄마는 늘 이 자리에서 너를 믿고 기다릴게.

그저 너의 속도대로 그렇게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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