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사색
도서관에 가서 읽을만한 책을 찾다가 금강경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찾고 있던 책은 다른 책이었으나, 눈에 보인 것일 뿐이다.
내가 종교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요, '일당백'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에서 금강경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이 전부였기에 불경을 보는 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했지만, 나름 종교와 철학에 관심이 있었기에 과감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사실 그 양이 길지 않아 쉽게 접근하기도 했는데, 이 생각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우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먼저, (감히) 금강경을 간략히 소개하자면, 세존(석가모니)의 제자 수보리가 세존과의 짧지만 깊은 질의응답을 32장으로 엮은 경전이다. 핵심 내용은 고통의 근원은 집착이며, 집착을 버릴 때 진정한 지혜의 길인 열반에 이른다는 내용이며, 그것을 위해 형식과 물질에 얽매이지 않은 본질을 깨우쳐야 한다는 내용인 것 같다.
내가 '같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금강경에 따르면 이해했다거나 깨우침을 얻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조차 진정한 깨우침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금강경의 글 자체는 매우 짧으나, 이해하기에 매우 어려워서, 챗GPT와 검색의 도움을 받아가며, 반복적으로 봐야 겨우 조금은 이런 뜻인가 보다 싶다. 금강경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A는 A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A이다.'라는 형태인데, 계속 읽다 보면 조금이나마 이 표현의 이유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금강경의 내용 중, 조금이나마 이해한 내용을 내 방식으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 모든 고통의 근원은 집착이며, 집착을 버릴 때 진정한 열반에 이를 수 있다.
- 하지만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포기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서 멈추거나 후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피동적인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집착을 버린다는 것은 능동적인 노력이며, 본질이 아닌 것에 대해 내려놓음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그렇다고 하여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선언한다던가,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설파하는 것은 허세요, 과시로 그것은 속세의 권위에 대한 집착의 한 유형이다.
- 금강경에서는 본질에 이르는 여러 가지 길을 제시하는데 그 방법의 하나로,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타인에게 베푸는 것(보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그 대가를 바라고 보시하는 것은 역시 인정에 대한 집착의 하나이기 때문에 대가 없는 베풂이 진정 본질에 이르는 길이라고 한다.
- 그리고, 최고의 베풂은 세상의 가장 귀한 일곱 가지 보물을 보시하는 것보다도 경전의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하는 것이 가장 큰 공덕이라고 하였다.
내용이 좋기도 하고, 전하는 것이 공덕이라고 하기에, 금강경에 대한 글을 좀 적어보면 좋겠다 싶어 키보드 켜고 글을 쓰는데, 쓰는 와중에도 현타가 오는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불경이라고는 읽어본 적도 없던 사람이, 겨우 금강경 하나를 읽어놓고는 이런 글을 쓰는 것조차, 허세의 한 형태요, 지식의 자랑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금강경을 읽고도 깨우치지 못한 자' 일 뿐인 것이다.
본질에 이르는 길은 참 어려운 길인가 보다. 특히 나 역시 배금주의에 사로잡혀있다고 생각하기에 아마도 궁극적인 깨우침에는 영원히 못 이르게 될 것이다.
진정한 깨우침은 특정 종교나 철학의 종류에는 구속받지 않는 것일 것이다. 비록 각자가 바라는, 믿는, 그리고 실제 배운 것과 행동하는 것들은 다를 수 있겠으나, 한 번쯤은 누가 전한 말인지를 떠나 좋은 가르침을 배워보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드는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