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달리기 하더니 살이 정말 많이 빠졌다.”
“그래? 많이 날씬해졌지?”
“응, 옛날에 배가 불룩했는데.”
“뚱뚱한 아빠가 좋아, 날씬한 아빠가 좋아?”
“아무 상관 없는데, 그냥 아빠 존재 자체가 좋아.”
예상치 못한 아들의 대답이었다. 당연히 ‘날씬한 아빠가 좋아’라고 말할 줄 알았다. 아들의 대답은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짓게 했다.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들의 멋스러운 표현에 대견함과 잘 성장하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더 이상 아빠가 생각하는 코흘리개가 아니라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들의 성장에 걸맞은 눈높이로 변화를 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의 다소 유치한 나의 장난에 콧방귀를 뀌며 거부했던 적이 있었다. 함께 산책하다 도로에 소방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승찬아! 로이다. 로이! 용감한 구조대 로보카 폴리~’하며 노래를 불렀더니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한다며 심각한 표정이 되어 하지 말라며 경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너무 많은 시간을 되돌린 감은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자신과 어울리지 않은 장난감은 잊어달라는 눈치였다.
단순히 무언가를 선택하도록 유도하는 양자택일의 질문이 통하지 않는 수준으로 아들은 성장했다. 신체에도 변화의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마를 광범위하게 덮은 2차 성징의 검붉은 흔적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아들은 흔히 말하는 폭풍 성장의 시기에 접어든 것이다.
이 시기를 함께하는 아빠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아빠로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든 아들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아빠이고 싶다. 세상 모든 것에 간지럼을 잘 타는 시기라 무턱대고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순 없다. 부모로서 뭔가를 해주려는 작은 배려가 자칫 지나친 간섭으로 인식될 수 있는 민감한 시기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할 자기 모습을 조금씩 다듬어가는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부모의 지나친 간섭이 완전히 다른 모습을 만드는 날카로운 조각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아서 잘 성장할 거라 믿고 자율성을 최대한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본인도 혼란스러워하는 질풍노도 시기에 함께 나누고 고민하면서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조력자가 있으면 좋다. 나는 아들에게 그러한 조력자가 되고 싶다. 그래서 아빠와 함께 취미를 공유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취미가 달리기인 아빠로서 아들과 함께 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승찬아! 아빠가 달리기를 좋아하잖아.”
“그렇지. 거의 맨날 뛰지.”
“아빠가 뛰어보니까 좋은 점이 참 많은 것 같아. 어떤 점이 좋은지 궁금하지 않아?”
“어떤 점이 좋은데?”
“먼저, 네가 말한 것처럼 몸이 날씬해져. 그래서 비만 예방과 건강 관리에 좋아.”
“나는 지금 뚱뚱하지도 않고 건강한데?”
“그렇긴 해. 너처럼 성장기에 달리면 키 크는데 도움이 돼. 또 집중력도 좋아져.”
“나는 키도 작지 않고 보통이고, 나름 집중력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아빠가 너랑 같이 달리고 싶어서 그래.”
“음......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볼게.”
“그래, 아빠랑 꼭 한 번만 달려보자. 가볍게 뛰면 돼. 힘들면 걸어도 되고. 알겠지?”
“알았어.”
이렇게 아들도 가끔씩 뛰게 되었다. 뛰다가 힘들면 걷게 한다. 나처럼 마라톤 할 것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는다. 선택과 결정은 아들의 몫이기 때문에. 그저 즐기다 보니 취미가 되는 순간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이것 또한, 아들이 재미를 느껴야 가능한 일이다. 아빠 따라 5km 달리기에 두 번이나 참가한 것을 보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달리기 위해 밖으로 나갈 때마다 아들에게 묻는다.
“아들, 같이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