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선유팀 신입사원입니다.'
부서배치 첫날 출근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부서에 도착해서 인사를 건넸더니 여직원이 회의실로 안내해서 대기하고 있던 중 한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서기에 신입사원임을 신고했다.
'네, 반가워요. 어서 앉아요.'
그 분은 웃는 얼굴로도 날카로운 눈매를 가리지 못하는 인상이었는데,
'나는 원유팀 팀장, 배OO 과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선유팀으로 배치된 신입사원입니다.'
'네, 알아요. 그런데 부서 내에 상황이 조금 변해서 선유팀은 신입사원을 못 받게 되었고 대신 원유팀에서 신입사원을 받게 되었어요. 괜찮겠어요?'
'아!, 네에.... 괜찮습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지원한 선유팀이 아닌 원유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는 설명인데 어차피 선유팀을 아이템을 보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역 프로세스를 잘 배우면 된다는 생각에 고른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본부 산하의 원유팀으로 배치되어도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했다.
'자, 주목! 오늘부터 우리하고 같이 일하게 된 박영진 사원입니다. 환영의 박수 부탁해요!'
이렇게 내 정글 생활은 시작되었다.
부서 배치 후 처음으로 맡게된 업무는, 입사 때의 포부와는 전혀 달리 1. 복사하기, 2. 문서 전달 심부름, 3. 텔렉스 배달 등 단순노무직이었는데 대략 6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물론 짬짬이 부서의 업무 내용에 대한 교육도 이루어져서 어렴풋하게나마 팀에서 다루고 있는 업무의 아웃 라인을 나름대로 그려나가고 있었다. 팀의 주요 업무는 중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원유를 수입해서 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정유 회사에 매도하는 업무였다.
팀에는 나보다 입사가 1년 빠른 선배 사원 두 명이 있었고 그들이 각각 중국과 사우디 아라비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팀의 업무 전반에 대해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중국 사업을 담당하던 선배 사원인 이명준 사원이 나에게,
' 영진씨, 업무 파악 많이 했어요?'
'네에...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직 완전치는 않습니다. ㅜㅜ'
'그렇구먼... 오늘 오후에 홍콩 거래선과 통화해야 하는데 전화 한 번 해 봐요.'
'네? 제가요? 무~슨 내~용으로.....'
'아, 다음 달에 선적할 카고의 일정이 확정되었는지? 조금 일찍 선적이 가능한지? 그리고 요즘 원유 생산 상황은 어떤지? 를 알아봐야 해요.'
'네에~~~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존심이 비교적 강한 편인 나는 해외 거래선과 통화할 만큼 업무 전반에 대한 파악이 되어 있지 않다던가, 영어로 의사소통하는게 자신이 없다던가 등의 하소연을 하기 싫었고 어차피 넘어야 될 산이라면 부딫혀보자 하는 오기에 홍콩 거래선에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당시만 해도 해외 통화 라인이 충분치 않았던 상황이어서 사내의 교환을 통해 해외 통화를 신청해야 했었고 핸드폰은 더더구나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사무실 내 책상위에 놓인 유선전화를 사용하는 수 밖에 없었다. 내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는 팀장 이하 고참 사원들은 물론 본부 내 직원들 그리고 붙어 있는 타 본부의 직원들까지 줄잡아 100여 명은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칫하면 동물원 원숭이 신세가 되기 쉬운 그런 상황이었다.
영어 회화라고는 신입사원 연수 때 받은 교육이 전부였고 회사 출퇴근 시간에 틈틈이 공부한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영어로 외국인과 소통한다는 것에 대한 중압감은 실로 상상 이상이었고 더욱이 독립된 공간에서 나 홀로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100여 명의 눈이 바라볼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통화를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내가 해야될 이야기를 사전에 준비한 후 교환에게 해외 전화를 신청했다.
'두근 두근......'
남들은 못 들었겠지만 전화를 기다리는 그 찰나에도 내 심장은 초긴장의 뻠뿌질을 힘차게 하고 있었다.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네, 교환입니다. 요청하신 홍콩 전화 연결되었습니다. 통화하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Hello! 한국 S 종합상사 원유팀의 박영진입니다.'
'Hello! @###$#%^%*^(*^(*&^)*&*%^$^$&%^$&^$'
해외 통화 특유의 거리감, 잡음, 랙이 걸리는 현상 등 전화기 너머의 음성이 뱉은 여러가지 단어 중 유일하게 알아 듣겠는 것은 Hello 가 유일했고 나머지는 문맥상 아마도 반갑다는 말을 한 것이었겠지만 내 귀에는 그저 난생 처음 들어보는 외계어에 가까운 그냥 소리일 뿐이었다. 해외 전화 신청을 할 때까지 당연히 잘 알아듣지 못해서 애를 먹을 것이라는 예측은 했지만 이건 안들려도 너~~무 안들린다. 큰일났다...
'다음달 선적 일정은 잡혔습니까?'
'@#%$%#&%#&%$&^%$*&%^*&%^((*&^)(*)&*(_(&_(_)(*_*_)(&&'
역시난 뭔 소리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ㅜㅜ
'선적 일정이 잡혔냐구요?'
'&*)*(&)(*(*&_(&_(&*)*^(&%(&*$*^$&#&%#&%#^%@^%%#&%@^@%'
'조금 일찍 선적이 가능할까요?'
'(*(*&^*%&%^&*$%^#&%#%^@#$@$^^%&&*&*$&#&%#%&@^$@@@%!%!&%#&#&&$&*%^*'
'네, 뭐라구요? 일찍 선적이 가능하냐구요?'
'&%(&(&*^(*&^)*^(&%*$*^&#%#$^%@^#@^$#@^&^%$*%^*&%&%(&%(&*%^*&'
아, 뭐라는거야, 이거? 해외 전화를 신청할 때의 긴장감은 오간데 없고 내 마음 속에는 외계어를 지껄여 대는 상대방에게 그리고 그 외계어를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 내게 화가 치밀기 시작해서 쌍욕이 쏟아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약 10여 분을 씨름하고 나니 이제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머리 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혹시 만다린할 줄 아시나요?'
왠일인지 선명하게 들리는 상대방의 언어는 나에게 만다린을 할 줄 아냐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어쩔! 그 당시 나는 만다린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고 더군다나 이미 기진맥진해진 내 머리로는 만다린을 무슨 게임이름 정도로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갑자기 왜 게임을 할 줄 아냐고 물어보지 하는 의아함을 품은채,
'미안합니다만 만다린은 할 줄 모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럼 텔렉스로 교신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나의 첫 해외 통화는 엉망진창으로 끝났다. 통화 직후에 안 일이지만 만다린은 북경식 중국어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나하고 함께 개발소발 의사소통했던 그 홍콩 거래선은 나와는 영어로 의사소통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자 혹시라도 내가 중국어로 소통이 가능한지 물러봤던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내가 일반회사가 아닌 종합무역상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현실을 다시 한 번 자각하게 되었고 영어 회화는 그 뒤로도 상당기간 내 일상의 큰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대학 2학년 때 도서관에서 영어책과 씨름하던 몇 명의 동기생들이 카튜사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한다고 했을 때, 무슨 군대를 시험까지 보며 가냐고 훈계를 했던 내 자신이 떠오르며 그 친구들이 나보다 훨씬 세상을 보는 눈이 빨랐구나 반성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