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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뉘 Nov 09. 2023

3초간의 침묵

뉴저지로 이사 온 지 삼주가 되어간다. 우리가 살던 코네티컷에는 없는데 뉴저지에는 있는 것들이 보인다. 다행히, 대부분이 반가운 존재들이다. 심지어 금요일 밤의 교통체증까지도 반갑다. 다들 교통체증을 겪어서라도 소중한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중인 거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 하고 싶은 게 있는 곳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차 안에 갇혀있는 게 조용한 동네의 뻥 뚫린 도로를 운전하는 것보다 낫다.


코네티컷에는 없지만 뉴저지에 있는 것 중 하나가 H마트다. 10년 전 맨해튼으로 출퇴근할 때만 해도 허름한 구멍가게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거부하기 힘든 음식이 넘쳐나는 체인점이다. ‘Crying in H Mart’라는 한국계 미국인이 쓴 에세이를 읽으면서, 또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것을 보면서 H Mart는 미국에 사는 아시아인들에게 고향을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뉴저지 시댁으로 오자마자 다음날 그 마트에 들렀다. 딱히 살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20분만 운전하면 이 마트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너무 짜릿했다. 이 사실을 만끽하고 싶었다. 코네티컷에 살 때는 시댁에 올 때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꼭 들리는 곳이었다. 냉장보관 해야 하는 음식은 사가기를 포기해야 할 때 언젠가는 더 가까이 이사오리라 다짐하곤 했다.




문득 선팩트 퍼프가 동이 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트 내 아리따움에 들렀다. 독도로션까지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고 있는데 직원의 시선이 느껴졌다. 몸을 돌리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 직원이 서 있었다. 직원과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우물쭈물하다가 3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한국 사람인가? 중국 사람인가? 아니야, 요즘 아무리 동양인이 비슷해 보여도 느낌이 한국인이야. 그럼 여기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인가? 영어가 모국어인? 아니야, 나이대와 머리, 화장법을 고려하면 한국어가 더 편한 사람이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둘 다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 굴리며 어느 말로 인사를 건넬지 결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한인마트이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오기에 출신 나라의 그 미묘한 차이를 읽고 있었다.


곧이어 우리는 살짝 머리를 숙이며 동시에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매장을 떠나자마자 남편은 그 3초가 얼마나 신기했는지 신이 나서 말했다. 나에게도 이 3초는 인상 깊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국어로 말을 걸어준다는 것은, 내가 속한 문화의 그 미묘한 차이를 읽고 비슷한 것에 익숙하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을 거라 암시했다. 그 희망의 암시에 꽤나 설레었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 모습은 이전의 나와 크게 다르다. 대학원 시절, 중국유학생, 한국유학생들이 끼리끼리 뭉쳐 다니는 걸 보고 일부러 이 무리와 친해지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했다. 왜 자신의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나지 않는지 답답해하기도 했다. 나만큼은 계속 시도해 영어실력을 늘리고 미국 문화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 더 살고 보니, 내게 익숙한 사람들과 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다양한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어쩐지 지금은 익숙한 한국 음식, 아시안 음식을 찾게 된다. 예전에는 새로운 문화 B, C, D를 알아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면, 지금은 상대가 나의 이야기 A에 공감하면서 새로운 것 A'나 A+를 나눌 때 더 통한다고 느낀다. 꼭 그렇진 않겠지만, 같은 인종일 때 비슷한 환경과 문화를 공유할 확률이 큰걸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이 가져온 변화를 받아들이며 이곳의 삶을 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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