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al Ailien

참아라, 참아 내어야 한다.

by 챠오벨라

2018년 우리가 한국에서 첫 해외 이삿짐을 싼다 했을 때, ‘어머 부러워요’라고 사람들이 말했다.

나도 새로운 곳에서 시작할 내 삶이 너무나 기대가 되고 들뜬 마음이었다.

하지만 2년 뒤 코로나가 유행하고 나서는 내가 살던 이탈리아의 부실한 의료체계를 보며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시선을 거두고

나에게 연민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으며, 부모님이나 지인들의 걱정거리의 한 요소가 되었다.

해외 생활은 결코 생각보다 멋있고 우아한 일만 있진 않다.

해외여행에서 느꼈던 그 설렘의 감정처럼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흥미로우며 재미있는 요소가 되어 내 마음을 설레게 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나의 삶과 익숙하던 것과의 괴리가 보이고 그 괴리로 인해 불편을 느끼고 비교를 하며 답답해한다.

답답함을 참아내고 불편을 감수하며 버티는 인내가 해외 살이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탈리아로 건너가 지내다가 두어 해 전 한국에서 다이소에 들러 출국 전에 필요한 물건들을 사러 갔었다.

그때 계산대에 줄이 좀 있었는데, 나는 한 세 번째쯤 차례였고 내 뒤로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줄을 선다는 것이 익숙해진 타국 살이 3년 차라 그런지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큰 소리를 내었다.

“아니 사람들이 이렇게 줄을 서는데 계산하는 사람이 한 명 밖에 없어요?”

그때 바로 다른 계산원이 왔고, 순식간에 내 앞에 줄이 줄어들면서 3분 여만에 계산을 마치고 나갔다.

‘그냥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왜 들 그렇게 재촉을 하지?’

당시 내가 느꼈던 찰나의 생각이었는데, 속으로 이 말을 뱉어놓고는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와.. 나 되게 거만해졌네, 나도 빠름의 민족 한국인이잖아 생각보다 빨리 바뀌었네’


처음에 이탈리아에서 체류 허가증을 받는데 무려 3개월이 걸렸고,

중간에 여름 바캉스 시즌이 있어 모든 것이 올 스톱이 되는 1달을 포함해 운전면허증과 ID카드를 받는데 또다시 3개월이 걸렸었다.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가면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 큰 대목조차도 20개가 되는 계산대가 단 한 번도 꽉 찬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나는 10분째 고기를 주문하려고 기다리는데, 앞에 차례 할머니는 점원에게 잡담을 걸고 점원은 아무렇지 않게 할머니랑 만담을 나눈다.

은행은 친한 사람이 없으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기다리게 하고, 공과금을 내러 우체국에 가면 역시 마찬가지로 단 한 번을 모든 창구가 다 열린 건 볼 수 없으며

운 좋으면 30분 운이 나쁘면 1시간에서 1시간 반까지 기다려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공과금을 수납하는 허탈하고도 열이 뻗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지금 살고 있는 러시아는 그래도 이탈리아보다는 빠른 게 많이 있지만, 제재로 인해 수입이 원활하지 않은 품목들은 주문하면 한 달이 걸리는 일도 있다.

버켄스탁 뮬 샌들이 사고 싶은데, 제재로 인해 버켄스탁이 철수하는 바람에 주문을 하니 중국에서 오느라 한 달을 기다리게 했고,

심지어 우체국으로 가서 물건을 찾아야 한다는 말에 ‘Здравствуйте(안녕하세요)’ 하고 말없이 핸드폰으로 자판만 두들기며 힘들게 택배를 찾아

‘спосибо(감사합니다)’ 겨우 두 마디 하고 안도하며 택배를 들고 집으로 냉큼 왔었다.

그렇게 나를 조마조마하게 만들며 받은 샌들은 열어보니 내가 사이즈를 제대로 주문을 넣었는데도 사이즈가 크게 와버렸다.

교환을 하자니 얼마나 걸릴지도, 되지도 않는 러시아어 실력으로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그냥 포기하고 신어버렸는데

마치 그 뮬을 신은 내 모양새가 남편 슬리퍼를 뺏어 신고 나온 듯한 모양새였다.

한국에서 30년을 살 던 나의 과거를 떠올려봤을 때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들을 5년 간 경험했고 그로 인해 내 성격도 바뀌어버렸다.


기다림은 일상이고, 불합리한 일도 많고 자질구레 한 불편함은 늘 일상이 되는 게 바로 해외 생활이다.


나는 진짜 예민한 사람이다. 그에 반해 남편은 굉장히 무던한 성격이라

한국에서 간혹 겪을 수 있는 불편함을 나는 견디기 싫어해서 뒤에서 구시렁거리기라도 하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지만

남편은 그냥 불편함을 전혀 못 느끼기도 하고 그냥 쿨하게 넘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나는 느긋하게 변했고, 남편은 구시렁거리는 것이 일상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한 번 생각해보니 크게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나는 아이가 학교에 있는 동안, 현지인들과 부딪혀야 하는 다양한 상황을 많이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남편은 늘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회사에서 업무만 하다 보니

체감할 수 있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나보다 경험치가 낮기 때문에 생활태도가 역전이 되었다.

또한 우리는 이방인이라는 것, 그 나라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인종차별이나 불합리한 상황에 놓여도 이와 같은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나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고 실제로 소모한 에너지에 비해 크게 나아지는 점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인종차별은 극단적인 예시일 뿐, 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상식과 가치에 내가 부합하지 않는 생각이나 태도를 지녔을 때

나는 그게 불합리하고 불편하다고 여겨지는데, 나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한다 할 지라도 결국엔 절대다수에 속한 쪽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내 목소리가 묻히기 쉽고 그저 공허한 외침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결국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런대로 두는 연습을 하게 되었고 결국에 그 과정 자체가 인내라는 걸 느꼈다.


워킹맘으로 살았던 기간까지 합쳐서 내가 사회생활을 한 시간은 3년 여 정도였는데,

해외생활을 하면서 인내를 배웠지만, 해외생활을 하기 전에 좀 더 인내를 일찍 배웠더라면

아마 조금 더 나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마음의 불편을 덜고 좀 더 편하게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맞닥뜨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때도 있다.

하지만 ‘What if’ 내지는 ‘I should’ve done’ 같은 이야기를 해봤자 달라지는 건 크게 없다.

그저 내 나이 불혹 전에 배웠다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래야 하는 것,

오늘도 나는 제재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스타벅스가 아닌 스타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업원을 위해 번역기를 돌리고

나를 이상하게 보는 러시아 인들의 시선을 참아내는 인내의 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