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675? - 750?), <고시사첩>

누구든, 어떤 이유로든 미칠 자유가 있다.

by 검은 산

김구림, 백남준, 이건용과 같은 작가들은 행위를 통해 작품을 만들어낸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퍼포먼스를 보고 그 자리에서 창작자와 함께 호흡하며 함께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을 만끽한다. 몰입의 순간이며, 억압하는 현실에서 탈출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작가의 도발적인 퍼포먼스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게 하며,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해 준다.


당나라에도 그런 퍼포머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욱張旭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장전張顚이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풀어헤친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그것을 붓 삼아 글씨를 써내려 갔기 때문이다. 그는 술에 만취한 체, 오히려 명료한 정신으로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꿈틀대는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그것‘을 표현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후대의 시인들은 그의 광기와도 같은 행위를 노래했다. 나는 자유다! 우리는 자유다! 같은 시대에 술에 취한 자들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그가 단연 최고였다.


장욱이 살았던 당나라는 처음 세워졌을 때, 신하의 거침없는 비판을 기꺼이 들었던 태종이 시대가 아닌, 그 건실한 기풍을 바탕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화려했던 시대, 양귀비와 현종의 시대였다. 상업은 발달하고, 여러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이 뒤엉켜 문화와 물자를 교류했던 개방적이고 풍류가 넘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장욱은 술에 취한 채 장안長安 거리를 거칠 것 없이 활보했을 것이다.


장욱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여기 조금 , 저기 조금 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장욱의 작품으로 알려진 <고시사첩古詩四帖>도 그의 사인 같은 것은 없지만 사람들이 오랜 세월 장욱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이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데에 합의하여 이 작품을 장욱의 작품이라고 판단했다.


<고시사첩>은 말 그대로 옛 시 4수를 이어 쓴 작품이다. 시는 위진남북조 시대의 시인 유신庾信의 <도사보허사道士步虛詞> 2수와 사령운謝靈運의 <왕자진찬王子晉贊> , <암하견일로옹사오소년찬岩下見一老翁四五少年贊>이다. <도사보허사>는 '도사가 허공을 거닐다'라는 의미인데, 장욱도 그렇게 술에 취한 채 붓을 휘두르면, 도사가 된 듯 하늘을 날아 거칠 것 없는 마음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장욱이 쓰는 서를 광초狂草라고 했다. 초서草書는 원래 편지나 문서의 초고 같이 빠르고 간편하게 쓰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발전한 자체字體인데, 이것이 장욱을 만나 전서篆書, 예서隷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 등 서예의 기본 자체 중에 가장 예술적인 자체가 된 것이다. 빠르고 간편하다는 초서의 특징이 인간의 감정과 행위를 담는 그릇으로 훌륭하게 탈바꿈한 것은, 장욱의 틀을 깬 창조성에 온전히 빚진 것이다.


구양순 이래 100년, 당나라는 변하고 있었다. 이 시대는 당나라 황제 현종의 최측근, 고력사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하고, 양귀비에게 먹을 갈게 해 시를 썼다는, 술에 취해 시를 쓰는 살아 있는 신선, 이백(李白, 701 - 762)도 있었다. 장욱이 이백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장욱은 당나라를 뒤흔든 안사의 난(755)을 겪지 못한 채, 극에 달했던 성당의 풍요로움과 그 안에 내재한 모순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목격하지 못한 채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장욱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백은 술에 취해 달을 쫓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지고, 시인 두보(杜甫, 712 - 770)는 좀 더 살아남아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나라 한가운데에서 피폐해진 삶을 노래했다. 장욱은 그저 화려한 시대를 화려하게 살다 간 퍼포머인가? 아니면 모순이 가득 찬 시대의 쇠망을 알리는 예술가였을까? 답은 예술이 그렇듯 ‘없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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