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의義를 새기다.
서예에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서는 쓴 사람과 같다’라는 뜻인데, 서예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이 말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른, 서예가 가진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예술이 창작자의 세계관에서 탄생하고, 작품은 당연히 창작자를 반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의 ’서여기인‘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 가치평가가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 점이 서예를 단순히 예술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같은 서書를 중국에서는 ‘서법書法’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서도書道’라고 하며 한국에서는 ‘서예書藝’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서書를 예술이라고 한다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되는 사람은 물론 왕희지다. 아무도 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당연하고도 합당한 일이다. 그렇다면, '의義'와 '不義'는 누구를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여기에 당연하고도 합당한 이름은 안진경(顏眞卿, 709 - 785)이다.
안진경은 <논어>에서, 한 제자가 죽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한탄했던 바로 그 안회의 후손이며, 난세의 지침서인 <안씨가훈>의 저자 안지추의 후손으로 명문가의 후예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찍 죽었고, 어머니와 외가의 도움으로 성장했다. 안진경은 20대에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그의 첫 직은 서고를 관리하는 비서랑秘書郞이었으며, 그의 첫 황제는 현종이었다. 만약 그대로 당나라가 번영했었더라면 안진경은 그의 선조들처럼, 학문과 서예에 능한 관료로서 그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격변했고 안진경은 40대 중반에 당나라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는 ‘안녹산·사사명의 난’을 만나게 된다. 10년을 이어진 그 내란은 안진경의 삶도 완전히 바꿔놓았다.
안진경은 안사의 난이 일어났을 때, 평원 태수로 나가 있었다. 관군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그 아수라장에서 안진경은 남은 군사를 긁어모아, 파죽지세로 진군하는 반란군을 막아섰다. 아마 그 자신도 반군을 진압하거나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황제가 피난을 가고, 관군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 중과부적의 치열한 공방에서 그는 가족을 잃었다. 그중에는 조카 안고경이 있었다. 포로로 사로잡힌 안고경은 투항을 거부하고 저항하다가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온전하게 수습할 수가 없었다. 안진경은 조카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문을 지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제질문고祭姪文稿>이다.
여기서의 '고稿'는 초고라는 뜻이다. 정리되지 않은 가슴과 머릿속에 생각들을 쏟아낸 글이란 뜻이다. 보통은 이런 습작들은 아카이빙의 대상이 될지언정 독립된 작품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 <제질문고>에는 제어할 수 없는 비통이 그대로 담겨있다. 감정의 동요가 글자를 흔들고, 치밀어 오는 분노와 슬픔이 붓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검은 먹은 마치, 산화된 피처럼도 보인다. 이 작품은 단순히 조카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아니다. 화려했던 왕조의 지난 시절을 애도하는 글이며, 지금 죽어간 사람들과 앞으로 죽어갈 사람들에게 바치는 애도이다.
안진경은 이 죽음들을 평생 기억했다. 여러 명의 황제가 등극하고 퇴위하고 등극했지만, 그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때 평원에서 반란군에 맞서 싸웠듯이, 조정 안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자들과 싸우고, 또 다른 역적들과 싸웠다. 황제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는 자신이 충심의 방향을 알았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783년 황제는 그를 이희열이 이끄는 반란군에 투항을 설득하는 사절로 보냈다. 말은 사절이었지만,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안진경은 3년간 억류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안진경은 마지막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먼저 가버린 사람들을 생각했을까?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을 걱정했을까? 아니면 이제는 쉴 수 있음에 안도했을까? 아마도 그는 떳떳했을 것이다. 먼저 간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는 그것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버림받고,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왕희지에게 당태종이 있었던 것처럼, 그의 가치를 알아보고 드높여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송나라의 사대부들 구양수, 소식, 황정견이다. 안진경의 서예는 한 때는 왕희지의 우아한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투박하고 거칠다고 평가받았지만, 이들 사대부들은 그 거침과 투박함을 웅장하고, 장엄하다고 표현했다. 아름다움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에게 안진경은 역사 속에 새겨진 완벽한 모범이었다. 안진경의 열렬한 추종자 소식이 안진경을 왕희지에 버금가는 전범典範으로 올려놓았다. 소식의 영향력이 커진 만큼 안진경은 더욱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왕희지를 '서성書聖'이라고 하고 안진경을 '아성亞聖'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