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을 써라
시대마다 사회의 주류가 되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한다. 삼국시대 신라는 골품제가 있었고, 고려시대는 문벌귀족이, 조선시대는 양반이 시대의 주류가 되어, 국가를 이끌어갔다. 중국에서도 송나라가 되면 ‘사대부’라는 존재들이 역사에 전면에 나타난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를 통해서 관리가 된다는 것이다. 과거제도는 수나라 때부터 시작됐지만, 기존의 귀족계급을 보조하는 역할로 한정되었을 뿐이고, 당나라 때에도 과거제도는 시행되었지만,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늠했다기보다는 문학적 재능을 더 중시했다. 이런 문화가 이백과 두보와 같은 위대한 시인을 탄생시켰지만, 이들에게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송나라가 되면 상황이 바뀐다.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등장한 다수의 사람들이 서로 첨예한 정치적 입장으로 대립하며, 국가를 어디로 이끌어가야 할지 논쟁했다. 사안에 따라서는 당파가 나뉘어 관로官路가 걸린 논쟁에 목숨을 걸기도 했는다. 왕안석의 신법당과 구양수의 구법당 같은 것이 그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이들 사대부들은 태어나면서 귀족이 되는 이들과 자신들을 구별했다. 혈통보다는 명분이, 의義가 중요했다. 나에게 명분과 의가 있다면 목숨을 내놔도 좋다는 이들의 자존심은 예술관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눈에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뜻이 중요하다는 이들의 인식은 형태의 아름다움과 완성도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입장을 견지한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가 소식蘇軾이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소식은 학문,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서 역사적 족적을 남겼는데, <적벽부赤壁賦>와 같은 작품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문으로 수많은 시인,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황주한식시권>은 <한식우寒食雨>라는 소식의 자작시 2수를 쓴 것이다. <한식우>는 소식이 중앙 정계에서 사건에 휘말려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해 황주 자사로 있을 때 지은 시로 중앙에서 밀려나 먼 타지에서 지낸 지 3년이 지난 한식날 쓸쓸한 소회를 담은 작품이다. 큰 포부를 품고 관리가 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 자의 마음을 노래한 이 시에 많은 사대부들은 자신을 투영했다. 이때의 좌절과 슬픔은 역설적이게도 소식에게는 강력한 영감을 주어 이곳 황주에서 <적벽부>를 짓기도 했다.
불을 피울 수 없는 한식날, 비까지 내리니 몸과 마음이 더욱 우울해진다. 황제가 계신 도성은 수만리 밖에 아득하고, 돌아갈 기약이 없는 심정이 담겨 있는 이 작품에는 여러 사람이 감상문을 남기고 있다. 예로부터 훌륭한 작품들에는 발문跋文이라고 해서 감상문을 남기는 경우가 많은데, 누가 남겼느냐가 그 작품의 가치를 더욱 높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는 소식과 뜻을 함께했던 황정견이 글을 남겼는데, ‘다시 쓰라고 해도 소식 그 자신이라도 똑같이 쓰지는 못할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세상에 뜻을 펼칠 수 없는 지식인의 좌절은 영감을 고양시키고, 자신이 쓴 시, 한 글자 한 글자에 담긴 모든 의미를 곱씹고 씹어, <황주한식시권>을 쓴 것이다. <난정서>가 그랬고, <제질문고>가 그랬듯이, 찰나가 영원이 되는 순간이 여기에도 있었음을 소식의 지우, 황정견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소식의 글씨가 두꺼비 같다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왕희지처럼 우아하지도 않아도, 구양순처럼 종이장 하나 허락지 않는 엄밀함이 없어도 그 안에 담긴 뜻만으로도 때로는 충분하다는 의식은, 사대부들에게 자신만의 예술관을 구축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송나라 궁정을 중심으로 한 정교하고 아름다운 채색화가 그려졌던 반면, 사대부들은 붓과 먹으로 자신의 내면을 표현했고, 그 작품들이 외형적으로는 완성도가 높지 않을지언정, 그만큼의 정신성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시대를 주도하는 자들의 변화는 미감마저도 변화시켰다. 그 변화의 가운데서 중심에 서 있던 이가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