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까지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 <꽃>이라는 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랑받는 시이다. 존재를 한 송이 꽃으로 그려내는 아련함이 시에게 기대하는 감성을 충분히 담고 있다. 나는 이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면 존재를 이름으로 규정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굳이 그 존재가 나에게 부여받은 이름으로 존재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름이라는 고유명사를 지워지는 순간 존재는 피아가 구별되고 별개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규정은, 혹은 이름은, 존재의 한계를 부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러한 감각으로는 무엇을 기억하는 일이 쉽지가 않다. 스냅사진처럼, 영화의 한 장면처럼 총체적인 기억이 아니면 대개 장기기억으로 남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딘가에 가서 무엇을 보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는 기억하지만 그곳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이름 붙이지 못한 것은 공유가 불가능한 체 내 안에만 존재하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남은 기억은 진하고 선명하지만, 그 외에도 소중했을 많은 경험들이 흩어진 것은 아마도 분명하지 않을까? 예전에는 그런 기억들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고유명사를 기억함으로써, 기억에 꼬리표를 붙여줌으로써 좀 더 쉽게 소환함을 포기한 것이 이제는 때때로 상실감을 던져 준다.
그래서 기록하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매일 남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건대 좀 더 효율적인 것은 이름, 지명, 숫자와 같은 고유명사를 좀 더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는 거대한 도서관에서 길을 잃지 않고, 필요한 자료들을 꺼내 쓸 수 있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잃어버려선 안 되는 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좀 더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는 결국 남는 것은 추억이라는 미화된 기억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고, 세상을 보다 선명히 보고 싶다는 소망이 갑자기 생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인생이라는 것이 대단한 성취나, 목표의 달성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 했던 이들, 먹었던 음식과 보았고 들었던, 읽었던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슬픔과 기쁨, 충족감과 여유, 좌절과 고통, 상실과 이해 정도가 전부일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는 중이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