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윤명(1460-1526), <전후적벽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by 검은 산


몽골이 세운 원元을 무너뜨리고 명明을 세운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국초부터 극단적인 황제 중심의 권력 집중을 추구했다. 필연적으로 환관이 황제의 주변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견제해야 할 사대부들은 수많은 옥사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때는 황제의 신임을 받는 신료였다고 해도, 언제 어떻게 죽임을 당하거나 집안이 몰락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원장의 의심이 바탕에 깔린 반지성적인 사고방식은 그 자손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갔다. 주원장처럼 수만 명씩 죽여가며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지가 자주 작동되지는 않았지만, 관료를 대하는 방식은 잔혹하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러나 명이 성립되자, 원에 의해 억압되었던 한족의 문화는 다시금 부흥기를 맞이했고, 특히 상업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해지고 화려해졌다. 특히 양자강의 남쪽, 운하의 발전과 더불어 이 경제적 부흥의 한가운데 있던 소주蘇州, 송강松江, 항주杭州에서는 명나라를 대표하는 예술가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오파吳派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룹에는 심주(沈周, 1427-1509)와 더불어 문징명(文徵明, 1470-1559) 등의 인물이 속해있었고, 당대의 천재라고 불렸던 당인(唐寅, 1470-1523)과 축윤명祝允明, 동기창(董其昌, 1555 - 1636) 등이 모두 이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은 성향도 다르고 인생의 도정도 각기 달랐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무엇보다 강남의 아름다운 풍광과 경제적인 풍요의 영향권 아래서 자신의 예술적인 개성을 드러냈다.


그중에 축윤명은 서書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육손이었는데 오른쪽에 손가락이 하나 더 있었다. 이 때문에 지지산인枝指山人 등으로 자신의 별호를 짓기도 했다. 그는 또한 술과 함께하는 기행이라는 이름의 방탕으로 이름이 높았다. 술과 여자, 도박에 진심이었으며, 연극을 좋아해서 연기를 하기도 했다. 거지들이 구걸할 때 부르는 노래 연화락蓮花落을 부르며 술값을 구걸하기도 하고, 관리를 속이고 사찰을 수리할 비용을 사기 쳐 그 돈을 유흥에 탕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50세가 넘어서는 지방관으로 부임하여 도적떼를 소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관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여전히 사치방탕하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빚쟁이에 쫓겨 다녔다. 다재다능하고 데카당스한 그의 삶은 강남문인들의 일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축윤명은 명이 세워진 100년 후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그 이전까지의 서書를 이전 왕조인 송원宋元 시대의 구습을 답습하여 창조적이지도, 아름답지도, 법도에도 맞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는 왕희지의 시대인 위진남북조 시대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서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는 해서楷書 특히 작은 해서체인 소해서小楷書에 뛰어났고, 초서草書 특히 광초狂草에 능하다고 평가받았다. <전후출사표前後出師表> 같은 작품을 정교한 필치로 정갈하게 써내는 동시에, <전후적벽부前後赤壁賦>와 같은 작품은 아무런 격식에도 구애받지 않고 바람에 투명한 비단이 날리는 듯 우아하게 써내는 그의 서書는 보는 이로 하여금 헷갈리게 한다.


축윤명, <전후출사표>, 1514, 도쿄국립박물관


그의 서를 얘기할 때, 사람들은 장인인 이응정李應禎이랄지, 외조부인 서유정徐有貞의 이름을 호명한다. 더불어 축윤명은 왕희지와 종요(鍾繇, 151-230)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의 이야기도 틀리지 않고, 축윤명의 말도 틀리지 않다. 서의 본류는 모두 한 곳에서 만나기 때문이며, 근본이 같지만 우리는 모두 시대의 제한 하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 하다.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전후출사표>에서는 종요의 모습이 보이고, <전후적벽부>에는 당대唐代 초서의 대가 회소(懷素, 737–799)가 보이기도 하지만 같지 않다. 그 미묘한 차이는 시대와 사람, 그 사람이 추구하는 바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는 명이라는 시대의 산물이다.


회소와 축윤명의 초서는 비슷하지만, 축윤명의 <출사표>와 <적벽부>는 다르다. 단순히 다른 스타일로 썼을 수도 있고, 그만큼 축윤명의 풍부한 재능을 보여준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그는 소주에서 나고 자라 그 문화에 젖은 방탕한 사람이었는가? 유교적 가치를 수호하는 사대부였는가? 그는 취해 있었나? 아니면 굴원은 하지 못한 일, 어지러운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함께 흔들거리며 최선을 다해 살았던 이였는가? 그는 시대를 대변하는 예술가였는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대신, 할 수 있는 일에 충실했던 그저 한 개인일 뿐이었는가?


한 사람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 없다. 그게 인간이다. 회소, 종요와 비슷하지만 절대 같을 수 없는 축윤명은 마치 우리와 같다. 부모님과 생김새는 닮았을지 몰라도 절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시대와 경험과 추구하는 가치가 그 다름을 만들어나간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