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하지 않은 존재를 위해

중드 <창란결>을 보고

by 검은 산

인간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는 그 일곱까지 감정(기쁨, 노여움, 슬픔, 두려움, 사랑, 증오, 욕망)으로 부터 벗어나면 과연 인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 오래된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중국 드라마 <창란결>을 보고 난 후였다. 칠정을 인위적으로 제거하고 업화를 다루게 되면서 삼계의 최강자가 된 월존 동방청창은 우연히 선계에서 제일 약한 선녀 소란화를 만나게 되고 동심 주술로 연결되면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과 신체의 상태를 마치 거울처럼 반영하게 된다.


동심 주술은 동방청창에게 본인의 것은 아닐지라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다. 기쁨, 슬픔, 노여움, 두려움, 사랑, 증오, 욕망이 동방청장에게 몰아치고, 그는 마침내 소란화의 것이 아닌 자신의 칠정을 되찾게 된다. 그리고 업화를 잃게 된다. 동방청창은 칠정을 제거해서라도 월족을 지키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기대와 월족의 존망存亡을 짊어지고 있었으나, 소란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잃고 싶지 않아서 업화를 다루는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국 소란화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게 되면서 유리화를 얻게 된다. 유리화는 업화보다 더 높은 단계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두 다스릴 수 있는 단계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사랑과 희생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이겠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칠정이 제거된 동방청창의 판단력과 실행력이었다. 불필요한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그는 매우 단순하고 명료하게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다. 월족의 안위와 명예회복, 삼계재패라는 최우선의 목표로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본좌'라고 지칭하는, 자신의 강함에 대해서는 1g의 의심도 없는 그런 태도가 부러웠다. 어찌 보면 칠정이 제거된 강력하고 단순한 그의 삶의 방식이 성공을 위해 달려가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지금의 한국에 딱 맞는 삶의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다.


칠정을 느끼게 된 후, 동방청장은 머뭇대고, 생각을 지나치게 많이 하고, 무엇이 옳은 판단인지 끊임없이 주변에 물어본다. 성공확률이 높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1%의 기대를 버리지 못해 안간힘을 쓴다. 월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괴로워 하지만, 그의 선택은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하나의 존재로 귀결된다. 상처받을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태워 그 존재를 붙잡고, 그저 조금이라도 함께 있기 위해 많은 기회비용을 날려버린다.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존재를 계속 존재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소멸시켜 버리는 선택을 한다. 그것을 그저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세상은 칠정이 없는 월존이어야만 타인 위에 군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칠정에서 비롯한 감정으로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월존인가 아니면 동방청창인가?


험한 세상에서 난관을 만날때마다 월존처럼 살기를 바라지만 그 또한 어렵고, 동방청창처럼 존재를 소멸시켜 사랑하는 것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래보지만 그 또한 어렵다. 칠정이 없는 얼어붙은 동토에 살 자신도 없고, 유리화에 존재를 태울 용기도 없다. 그래서 드라마를 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칠정 한가운데 허덕이는 존재로, 완전하지 않은 또 다른 존재들을 미워하면서 슬퍼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하지만 가질 수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와중에 조금이라도 용기를 얻고 싶어 드라마에 넋을 잃어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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